-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에서 이제 막 피어나는 기운을 받는다면, 낙엽 우-수수 떨어져 앙상하기 그지없는 나뭇가지에 흠뻑 쌓인 눈은 그 모습이 위태해 보여도 그 안에서 겨울의 낭만을 느끼게 한다. 그러다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툭 하고 스치며 파-르르 허공을 날면 눈은 그 바람에 조각이 되어 샤-사사 떨어진다. 겨울이 주는 풍경은 봄, 여름, 그리고 가을과 사뭇 다르다. 우리 선조들의 그림에서 만나는 눈을 뗄 수 없는 겨울의 모습, 그 안에서 시대의 낭만과 여유 그리고 정서를 느껴보자.
-
매화 한 그루에 시선이 고정된다. ‘어! 매화나무다!’ 그러며 시선을 옮기다 보면, 작은 암자 하나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암자를 놓치기 쉽다. 그림 위 쪽 시문을 참고하면, 이는 송나라 시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산 임포(林逋, 967-1028)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작은 암자는 바로 외딴 산속에 숨어 산 임포의 거처이다. 조선 말기 유행한 이색적 화풍을 구사한 화가 북산(北山) 김수철의 작품으로 매화가 있는 산수 로 간략한 필치와 단순한 형태를 보인다. 선명한 색채도 두드러지는데 산과 바위의 음영 표현 없이 윤곽선만으로 표현되어 김수철 그림의 특징인 간결함이 잘 드러난다. 문인화적 요소가 짙은 산수화로 화면 전체가 좌우로 2등분 된다. 왼쪽에는 화면 가득히 산수와 수목, 누각을 그렸고, 강을 경계로 하여 중경과 원산을 선염법으로 처리했음을 볼 수 있다. 임포가 머물고 있는 집, 임포의 붉은 옷 색, 다리를 건너 오는 푸른색의 사람은 대비를 이루니 놓치지 말자.
-
마치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오랫동안 내린 눈이 산에 쌓인 것인지, 새하얀 암석인지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눈이 산과 언덕을 뒤덮은 가운데 몸종을 거느린 나그네가 다리를 건너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모습도 눈길을 걷는 듯 위태로운 듯하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나그네는 추운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조심조심 걷는다. 뒤따르는 시자는 어깨에 짐까지 메고 그 뒤를 따른다. 심수(心水) 이정근의 작품이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 윤두서는 이정근이 안견을 따라서 필법이 정 교하여 이불해(李不害)의 선구로 삼을 만하다고 평했다. 이 작품 역시 조선 초기 안견 화풍을 따르고 있 는데 산의 모습에서 <몽유도원도>의 영향이 드러난다. 이정근의 기품과 활발한 필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
멀리 보이는 산은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단조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나귀와 나귀를 탄 선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작품이다.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나귀를 탄 인물이 겨울날 파교(灞橋)라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파교는 중국의 시인 맹호연이 매화를 찾아 건넜다는 산시성(陝西省)에 위치한 다리이 다. 맹호연은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시서화로 많은 문인에게 감명을 준 인물이다. 추운 가운데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를 찾아 떠나는 것은 어떤 환경에도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선비의 정신을 상징한다. 구성과 내용이 지극히 단순화된 작품으로 정선의 장점이 돋보인다. 과감한 생략과 강조가 발휘되어 중요한 요소만 부각하면서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다. 고사인물도로 선비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장르의 그림이다.
-
설경에 어울리는 집 한 채는 겨울 모습과 하나 되어 청빈함을 느끼게 해준다.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중국 송대의 유학자 정이 선생의 고사를 그린 것이다. 두 제자가 스승을 만나러 갔을 때 선생이 마침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 스승에게 방해가 되지 않고자 눈이 무릎까지 쌓일 때까지 밖에 서서 기다렸다는 내용을 담았다. 배경과 집 등은 먹으로만 그렸으며 정이 선생이 있는 방 안의 바닥은 밝은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정문입설(程門立雪)은 ‘정씨 집 문 앞에 서서 눈을 맞다’라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을 존경함 또는 간절히 배움을 구하는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 다. 중국 송나라 때 양시와 유초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정선은 고사 내용에 충실하였으며, 온통 눈으로 덮인 산을 배경으로 양쪽의 대와 매화는 선비의 지조를 나타낸다.
-
눈 쌓인 산야로 하얀 매화꽃의 모습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매화나무 사이 집 안에 있는 남자는 누군가 기다리는 듯하고, 다리를 건너는 붉은 색 옷을 입은 남자는 서둘러 어디로 향하는 모습이다. 19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전기(田琦)가 그린 것이다. 전기는 30세의 나이로 일찍 타계했으며 신분은 높지 않았으나 시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문인화 의 높은 경지를 이룩했다. 몇 점 안 되는 유작에서 그의 인품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화면 아래쪽 ‘역매인형 초옥적중 고람위(亦梅仁兄草屋笛中 古藍爲)’라고 적힌 글귀를 보아 전기가 오경석에게 주기 위해 그렸던 것으로 본다. 오경석은 역관 출신으로 매화광이었다. ‘매화초옥’ 또는 ‘매화서옥’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둘레에 눈송이처럼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서재에 선비가 앉아 글을 읽거나 매화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
앞서 살펴본 그림들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이 묘사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삶의 지혜와 태도가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더 깊은 울림이 전달된다. 우리에게 펼쳐지는 겨울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의 겨울 속에서도 각자 삶의 혜안이 그려져 있기를 고대해본다.
- 참고자료
- 이윤정 , 2005, 『조선말기 북산 김수철 회화 연구 : 산수화를 중심으로』,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 박은순,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그림」,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8
- 영남일보 주말매거진,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전기 作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2016-12-23,
http://www.yeongnam.com/weekly/
원고 작성 및 편집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