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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고리 적에’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여기서 ‘고리 적’이란 고려 시절을 뜻한다. 한자는 같은 글자를 여러 소리로 발음하는데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고리’로 발음되었다. 고려를 아득하게 먼 옛날로 여겨졌기 때문인지 ‘고리 적’이란 아주 먼 옛날을 뜻한다. 아주 먼 옛날, 그때의 고려를 아는가? 고려가 어디였는지? 유적이 무엇인지? 잘 떠올리지 못한다. 이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남북분단을 겪은 불행한 근현대사의 역사와 관련 있다고 전해진다. 자, 여기 그 고려를 알려줄 전시가 준비되었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대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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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12월 4일에 광복 이후 고려 미술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인 특별전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의 문을 열었다. 이 전시를 위해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4개국 11개 기관, 국내 32개 기관 등 총 43개 기관에서 주요 문화재 440여 점이 출품되었다. 올해 고려 개국 1,100주년을 맞아 여러 박물관에서 크고 작은 전시들이 열렸지만 특별전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은 이 모든 전시의 종합 편이자 하이라이트라 말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미 지난 7월 20일 어린이박물관 특별전 <빚고 찍은 고려>를 ‘고려’ 입문 전시로 연바 있다. 어린이박물관 전시는 상감청자와 금속활자를 주제로 고려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에 주목하여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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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통해 고려의 창의성과 고려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럽보다 150년 앞선 고려활자,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고려대장경, 세계 최고의 그림 고려불화, 세계 최고라는 중국에서도 감탄한 고려청자, 우리문화에서도 세계에 내어놓아도 가장 아웃스탠딩(Outstanding 뛰어난, 걸출한)한 고려시대의 문화를 통해 조금은 희미하게 생각하는 한국문화를 이번에 세계의 다른 어느 문화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말처럼 이번 전시는 우리문화에서 예술적 최고봉의 시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고려의 화려한 예술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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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전시인 만큼 소개되는 유물도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데 그중 눈에 띄는 출품작은 해인사 소장 ‘희랑대사상(보물 제999호)’일 것이다. 승려 희랑대사의 초상 조각으로 해인사 내에서 전시한 적은 있지만, 외부에서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라고 한다. 이러한 희랑대사상의 기념비적인 나들이를 위해 지난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양일에 걸쳐 해인사에서 국립중앙박물관까지 모시고 오는 의식인 이운(移運) 행사가 열렸다. 합천을 떠난 유물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사적 제223호 숭의전지에 먼저 도착했다. 약식 고유제와 고려가무악 연주 등도 함께 열렸다. 유물은 1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고, 취타대, 전통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박물관 열린마당까지 안전하게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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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랑대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정신적 지주였다. 원래 이번 특별전에는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이 소장 중인 ‘청동 태조 왕건상’이 출품되어 희랑대사상 옆에 나란히 전시함으로서 1,100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꾀하려 했으나 불투명한 출품여부로 인해 일단 보류되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북한 측이 왕건상을 대여할 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서 “일단 왕건상 자리를 비워두되 설치예술의 형태로 꾸밀 예정”이라고 밝혔다. 비워두는 것 자체도 전시의 일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또한 개막 이후라도 왕건상이 도착할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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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말해주고, 보여주는 수많은 유물은 크게 네 가지의 주제로 나뉘어 전시된다. 1부는 왕실의 미술을 중심으로 고려의 바다를 통해 드나든 다양한 물산과 교류를 살펴본다. 고려는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새로운 문화를 수용했다. 국토의 중심부였던 개경이 수도였고, 단지 큰 도시를 넘어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다. 송나라 사절단이 오기도 했고 상인들의 배도 빈번히 드나들었다. 이국인의 눈에 본 고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은 찾아갈 수 없는 고려의 중심, 개경과 왕실의 미술품이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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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는 고려 사찰의 미술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이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그 중 불교는 국가 종교이자 사상이었고 삶과 정신의 중심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고려가 이룬 문화적 성취는 불교문화에 기반을 두고 정점을 이룬다. 고려의 불교 정신과 가치를 1098년 판각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 ‘대방광불화엄경 수창년간판’, 세계적인 희소가치와 예술성을 인정받는 불화와 불상 등 불교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통해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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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는 ‘차가 있는 공간’, 고려의 다점茶店이다. 다점은 현대의 카페처럼 고려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번 전시에는 차가 고려인의 생활과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에 주안점을 두어, 차를 마시던 공간에서 바라보았을 경치와 귓가를 스쳤을 소리, 실제 차를 덖는 향기를 관람객이 전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4부는 공예의 나라 고려이다. 모두가 보고 감탄한 고려청자가 당시 신기술에 대한 고려인의 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정교하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아름다움과 나전칠기의 치밀함은 도전 결과로 이룬 예술성의 정점이다. 뛰어난 공예품은 기술의 수용과 교류, 서로 이질적인 것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도전의 역사인 고려 미술 속에 담긴 우수성과 그 가치를 재조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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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나라 고려, 잊힌 외국의 이름이 아니지만 우리는 고려에 대해 잘 모른다. 대한민국의 영문 명칭인 ‘코리아’라는 국명은 ‘고려’에서 유래했으며 우리는 아직도 ‘고려인이 사는 나라’ ‘고려인의 땅’에 살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수도 개경의 송악산에 올라본 적도 없고 백두산과 개마고원도 남의 나라 이야기 같다. 하지만 태조 왕건이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훌륭한 군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라고 남긴 유언은 한번은 들어봤을지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한 시간 속에 꽃핀 찬란한 문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 우수성, 독창성, 국제성은 무엇인지 그 속에 담긴 정신은 또 어떤 것인지 올 겨울 관심을 가져보자.
원고 작성 및 편집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