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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의 다양한 전시실을 둘러보다 보면 작품 감상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 과거로 시간 여행도 할 수도 있지만, 아시아관의 일본실·중국실 등 이웃 나라 전시실을 관람하다 보면 이국적인 미감에 그 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박물관에서 만난 다채로운 문화가 담긴 전시품을 통해 시각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보자. 이번호 <뮤진화첩>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시아미술품들을 통해 색다른 문화기행을 떠나보려 한다. 한국과 인접한 아시아 각국의 유물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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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건축물이 화려한 채색에 평면적으로 표현되어 마치 예쁜 그림엽서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비바사’는 ‘빛’을 뜻하며 ‘라가(rāga)’는 멜로디의 종류로 인도 전통 음악이다. 인도인은 우주 에너지의 변화에 따라 시간대마다 연주할 라가를 정해두었다. 라가는 인도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비바사 라가는 동틀 녘에 연주되었다. 라가를 주제로 한 세밀화에는 각각의 멜로디가 전하는 분위기가 그림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멜로디를 시각화한 그림은 인도 미술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그림 상단에는 멜로디 유형과 이미지를 설명하는 구절이 적혀 있다. 그림 중앙에 화려한 잠자리와 음식물을 담은 그릇, 촛대가 나타나는데 누군가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왼쪽에 귀족 남성으로 보이는 인물이 새를 들고 있고, 그 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한 여인이 있다. 이외에도 세 명의 시종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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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한 쌍이 나란히 서 있는 나무 조각상이다. 신체보다 얼굴과 두상 부분이 부각되어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남신상은 오른손에 낫을 들고 있으며 허리끈을 앞으로 늘어뜨렸다. 여신상은 두 손을 배에 올렸으며 양 갈래로 묶은 머리는 마치 중국의 쌍상투 같다. 19세기 인도네시아 발리 니아스족에 의해 만들어진 ‘아두시라하(Adusiraha)’라고 불리는 곡신상(穀神像)이다. 이 곡신상은 중국 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채색 백자 초화무늬 바리에 받쳐져 있다. 바리 안에는 사악함을 물리치는 의미로 팥죽을 채워 넣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 상인이 중국 도자기를 대량으로 들여와 이러한 채색 자기들이 일상적인 용기로서 사용되었다. 풍작을 기원하고 농부들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곡신상으로 남녀 조각 모두 나뭇결이 드러나는 질감과 절박한 모습에서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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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북동부의 대표적인 선사 유적 반치앙(Ban Chiang)에서 출토된 굽다리 단지이다. 반치앙은 동남아시아 최대 선사 유적지로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토기 모두 집 아래에서 여러 층을 이루며 발견되었는데 묘실 내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부장품으로 추정한다. 죽은 이를 이곳에 묻고 이주했다가 다시 돌아와 생활한 후 또다시 죽은 이가 생기면 묻은 후 이주하는 것을 반복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크림색 바탕 위에 주색(朱色)으로 단순한 문양을 그렸다. 나선, 소용돌이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나뭇잎, 꽃 모양 등의 자연적인 것을 그렸다. 붉은 칠을 한 소용돌이 문양의 토기를 관 형태로 시신 주위에 두른 것으로 보아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죽은 이가 환생하기 위해 다시 어머니 자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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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걸개는 신들의 섬으로 불리는 인도네시아 발리에 사는 발리족이 마을 수호신의 사당이나 집 입구 처마 밑 등에 액자처럼 걸어 둔 장식품으로 이를 통해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다. ‘펜자가 루마(Penjaga rumah)'로 불리며 나무에 사자의 정면 모습을 조각하고 다양한 색을 칠했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고 여겨지는 사자의 얼굴로 갈기를 비롯해 머리카락, 이마선의 끝부분이 둥글게 말려있다. 부릅뜬 눈, 날카로운 이빨, 큰 귀는 중국의 용과 비슷하다. 발리는 11세기부터 힌두교를 믿었는데 힌두교의 토착 신과 함께 불교적 요소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볼 수 있는 장식품이다. 발리 사람들에게 힌두교는 종교라고 접근하는 것 보다 이들의 관습과 사고방식 등을 종합한 하나의 큰 문화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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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아도 술잔이지만, 그 모양이 매우 기괴하여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유물은 중국 쓰촨성(四川省)에 사는 소수 민족인 이족(彝族)이 나무로 만든 술잔이다. 바탕에 흑칠을 한 후 붉은색, 노란색으로 여러 모양을 조합시켜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표현했다. 그 아래로 4개의 발톱을 가진 매의 발을 잘라 술잔의 받침대로 삼았다. 이족은 자연 숭배, 토템 숭배, 조상 숭배 등의 원시적인 종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했다. 동·식물 등을 숭배하는 것은 자연물에 신령과 영생이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여 풍작과 평안을 준다고 믿었다. 또한, 특정 동·식물이 자기 씨족을 보호한다고 믿어 수호신으로 여겼다. 이런 원시의 시대적인 문화가 영향을 미친 술잔으로 바탕의 흑색 역시 검은색을 숭상한 이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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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얼굴을 한 여인의 가면이다. 가면은 편백나무를 깎아 색을 칠해 만들었으며, 둥근 얼굴에 가는 눈, 붉은 입술과 검게 칠한 이빨을 가졌다. 이 가면은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무대극인 노(能)에서 사용한 것이다. 노(能)는 신에게 바치던 신성한 무대이자, 주로 귀족이나 고급 무사들 사이에서 향유되었던 무대예술이다. 이 가면은 무대에서 젊은 여성의 역할에 사용된 것으로 신분이 높은 여성의 우아함을 나타낸다. 실제로 일본 고위층 여성들은 바깥출입을 삼갔기 때문에 외부의 이성과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따라서 작가는 미지의 존재였던 여성이 지닌 신비로움을 가면에 그대로 반영함과 동시에 독특한 분위기의 조형미를 연출하여 시선을 끈다. 가면의 뒷면에 ‘児玉近江’의 소인(燒印)이 있어, 고다마 미쓰마사(児玉満昌, ?~1704)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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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본 유물들은 단순히 한 나라의 수려한 예술성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유물 속에 시대의 정신, 민족성, 나라의 종교 등 다양한 문화가 하나로 집약되었다. 그 속에 다양한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통해 각 나라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원고 작성 및 편집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