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스산하게 불어오는 가을의 한 가운데에서 천년의 향 ‘옻’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옻칠공예가 이은희 작가를 만났다. 서대문구 연희동의 조용한 동네, 약간의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자 이곳이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즈넉함이 느껴졌다. 이은희 작가는 거주하는 집 2층 전체를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며 안내해주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커피를 내려 자신이 옻칠로 만든 ‘잔’에 담아주었는데 나무로 만든 긴 옻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멋스러움이 더해졌다. 잔은 무척이나 심플했지만 깊이감이 전해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의 고사성어를 생각나게 했다.
작가의 성품을 반영하듯 잘 정리된 작업실을 둘러보니 선반에 일렬로 놓인 커피 잔이 옻칠기법에서 우러나오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시선을 끈다. 벽시계에 장식된 자개의 반짝거림은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은은한 빛을 발산하며 가슴에 스며든다. 생활에서 나오는 쓰레기까지도 작업하는데 필요한 도구로 활용하며 작업의 공정을 연구할 정도로 그녀의 일상은 작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이은희 작가는 꽤 다채로운 이력을 지니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대학원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옻칠 전문 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했고 ‘세움, 비움’이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며 자연스레 컴퓨터 그래픽과 프로그래밍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고, 당시만 해도 컴퓨터 보급이 활발하기도 전이었지만 스스로 컴퓨터 언어를 배우고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산업디자인과 IT 분야의 디지털 디자인프로세스를 중심으로 20여 년간 강의했고,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었던 디지털 환경과 가상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의 비 물리적 환경은 물리적 환경과 괴리되어 진행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서도 디자인은 윤리나 태도 등 아날로그적인 우리의 일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하는 역할이 중요하지요. 하루가 멀다 하게 변해가는 디지털 기반 기술의 환경 속에서 아날로그의 예술 문화적 속성이 더욱 중요한 가치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 시간을 초월한 우리 고유 전통 문화예술의 소중한 가치들을 자연스레 존중하게 되었고 새로운 이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공예였고, 옻칠이었다.
옻칠과 나전이라는 재료와 작업은 그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옻은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섣불리 도전하기 꺼릴 수 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그녀는 도전에 의미를 두었고 2003년, 작업에만 전념한 예술가들보다는 늦은 출발이었지만 새로운 환경을 접하게 되었다. 무형문화재 사사를 시작으로 배움은 끝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명장이나 장인들에게서 얻는 기술과 재료에 대한 경험을 체득해가며 새로운 것을 시도, 다양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가기도 했다. “옻은 생산지뿐만 아니라 숙성시간이 원재료를 차이 나게 하고 습도, 온도, 칠의 두께나 횟수, 말리는 시간 등 여러 조건에 따라 수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지요. 이 과정에서 저는 수시로 새롭게 다가오는 재료의 탐구에서 아이디어를 더하고 방법을 연구하며 그 변화무쌍한 옻칠의 세계에 지금도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느낀답니다.”
이은희 작가는 옻칠공예를 오늘의 시대 언어로 구현해 내는 즐거움을 작업에 임하는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녀는 ‘옻칠디자인’ 전도사로서 그 가치를 전하고자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갤러리 온’이라는 옻칠디자인 전문 갤러리 카페를 오픈해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고유 브랜드를 만들어 우리 전통의 옻칠이 지닌 신비로움과 우수성을 알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잔과 받침이 세트인 세움(SEUM) 시리즈가 2008년 특허를 취득했고, 유네스코 우수 공예품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2013년 세계 최대 인테리어 박람회인 ‘메종&오브제 파리’에서는 전 상품이 매진되기도 했다. 30~40단계를 거쳐 전통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가의 잔(盞) · 함(函) · 합(盒) · 반(槃) · 기(器) 등의 공예품이 국내는 물론 미국 · 프랑스 · 독일 · 사우디아라비아 등 국외에서도 우수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고 있다.
천년을 이어 가는 옻칠공예의 과정은 사포질, 칠, 숨골 메우기, 삼베나 한지 바르기에도 정성은 물론이거니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엇 하나 기계의 힘을 빌릴 수도 없다. 손으로 하나하나 갈고 다듬고 칠하고 기다리는 과정을 거듭하며 시간의 미학을 배운다. 유심히 작업을 살펴보니 유독 소품 위주의 것이 많아 살짝 궁금했다. “작은 것에 대한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아요. 생활 속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공예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일이고, 동시에 쓰임이 많은 것, 손이 쉽게 가는 것이어야 대중의 접근도 쉬워진다 생각한답니다. 그래야 대중들도 우리 공예의 우수성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지요.”라고 답하면서 작업실 곳곳에 있는 옻칠 작품과 과정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진정성을 가지고 전통을 올바르게 지켜가야 합니다. 21세기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전통이란 과거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기술과 표현의 통합으로 인해 발전해온 규율과 거기에 더한 시대정신과 독창성입니다. 따라서 전통을 답습하기보다 현대와 접목해서 그것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삶 속에서 전통에 대한 지식과 깊은 안목을 가지고 쓰임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손으로 이뤄지는 공예는 특성상 완벽하기 어렵지만, 하나하나에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만들어 간다는 역할로 의미가 있으며 이로 인한 창작의 기쁨으로 그녀는 늘 행복해 한다. 자연으로 빚은 옻칠의 빛과 멋이 생활 속에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지켜나갈 수 있도록 디자이너로서 오늘도 자신만의 조형세계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