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골목길을 걷다 보면 불 꺼진 상점들 사이로 불빛 하나가 새어 나온다. 어느 카페 안 조명이 하얀 커튼을 이겨내며 밤거리를 은은히 비춘다. 눈부시게 화려한 조명보다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작은 조명이 마치 카페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하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조명 하나가 머금은 빛은 골목을 온기로 채울 만큼 부드러웠고, 지친 누군가의 감정을 토닥여줄 만큼 따뜻했다. 며칠 뒤 다시 그 카페 앞을 걸었다. 며칠 전 새어 나온 불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지로 만들어진 조명이었다.
한지로 만들어진 조명이 건네는 첫인사는 은은하며 편안했다. 빛, 바람 등 모든 걸 포옹할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함도, 낯선 이와 금세 가까워질 수 있는 친화력도 있다. 섬유 공예 디자이너 강민지 씨도 이러한 매력에 반했을까? 그녀는 한지, 삼베, 모시를 소재로 조명을 만들고 있다. 많은 재료와 요소 중 왜 하필이면 조명일까.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6월 초 성남의 한 카페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조명에 불을 밝히듯 입을 열었다. 섬유디자인을 전공하며, 공간을 채우는 요소에 대해 고민하던 중 ‘빛’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이에게는 어둠 속 작은 불빛 하나가 고마운 존재가 될 수 있는 반면, 죄를 지은 어떤 이에게는 태양이 내려다보는 한낮의 빛이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다며, ‘빛’이 가진 이중성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그러다 ‘빛’을 보며 사람들이 좀 더 따스한 감정과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조명 만드는 작업을 선택했고, 고마운 존재로서 ‘빛’의 역할과 ‘빛’이 건네는 아름다움에 집중하였다.
많은 소재 중 왜 하필 한지, 삼베, 모시 같은 전통의 재료였을까. 그녀는 유년 시절 추억을 곱씹었다. “부모님은 큰 딸인 제게 뭐든 경험할 수 있게 해주셨답니다. 초등학생 때는 전통 무용, 중학생 때는 가야금 등을 배우면서 전통을 낯설지 않게 느끼게 되었고 전통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댄스 음악보다 전통 가락이 오히려 더 신명 난다고 덧붙인다. 전통문화를 가까이에서 접했던 그녀에게 어쩌면 전통의 재료는 낯선 것이 아닌 익숙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며 사용하는 재료가 자신을 닮고 있다고 했다.
어떤 점이 본인과 닮았는지 물었다. “제가 사용하는 재료는 모두 직물이랍니다. 이 직물은 자신들만의 질감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인위적이지도 가공적이지도 않습니다. 올이 뭉치면 뭉쳐있는 그대로, 실밥이 있으면 있는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직물이 가진 구조 자체가 하나로서의 질감이 됩니다. 보기엔 투박해 보이고 까슬까슬하지만, 숨김없이 소재가 뽐내는 각자의 매력이 있습니다. 꾸미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투박스러운 매력이 제 모습과 닮았습니다. 하하.” 한지, 모시, 삼베는 한 올 한 올 그 결이 참 멋스럽다. 빛을 적당히 투과하는 재질이기도 하고 가볍고 유연해 다양한 형태로도 만들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녀는 한지, 모시, 삼베와 같은 전통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 하는 작업을 한다. 프레임 없이 하나하나 손으로 접어 볼륨을 만들고 겹치고 접히고 붙이고 또 무늬를 만들어 입체적인 조각을 만들어낸다. 패턴이 들어가는 조명의 경우 디자인한 패턴을 삼베와 모시로 구성해 빛의 투과성이 두드러지게 한다. 특정한 모양의 조명은 각각 작업한 조각을 결합해 소재의 두께를 이용해 빛의 투과량에 차이를 둔다. 선과 면의 힘으로 만드는 형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또 하나의 조명이 되고 이를 통해 새어 나오는 빛의 울림은 크다. “소재마다 나름의 빛 투과도가 있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빛이 은은하면서도 감성적이랍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는 것이 작업의 가장 큰 목적이라며 재료에 대한 고집을 놓지 않은 그녀이지만, 재료를 사러 갈 때면 시장 어귀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어르신들이 꼭 한마디씩 거든다. “젊은 처자가 무슨 연유로 삼베를 그리 사가냐?”고 말이다. 어르신들의 시선에 삼베는 복식이나 침구를 제작하는 전통 소재일 뿐이지만, 젊은 작가의 눈에는 또 다른 가능성을 지닌 새로운 창작 재료가 된다. “소재가 가진 이미지 때문에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어르신들이 생각할 때 삼베는 삶과 죽음을 다루는 소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결국 ‘빛’도 이와 비슷하단 생각이 듭니다. 생과 사의 순간 누군가에게 희망의 한 줄기 햇살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자동차 불빛, 네온사인 등 일상에서 마주하는 인위적인 빛으로 누적된 피로를 전통 소재를 통해 위로해주고 싶다는 그녀는 조명을 시작으로 공간을 채우는 요소에 관심을 계속 둔다. 사찰에 가면 탱화의 색채와 구성을 놓치지 않고 살펴보고, 해학적이고 자유로운 구성의 민화를 보면 작품을 구상하게 된다는 섬유 공예 디자이너 강민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시 관람과 주변의 피드백에서 영감을 받는 그녀는 앞으로도 달콤한 말보다 쓴 소리를 더 귀담아 들으며 공간과 조명에서 심리적인 안정과 편안함을 주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이제 그 빛을 내보려는 30대 젊은 작가, 강민지가 가진 고민은 작업에 뒤따르는 숙명과도 같다. 하지만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하나하나 퍼즐 맞추듯 그 빛을 조각해간다면 언젠가 그 ‘빛’이 또 하나의 언어가 되지 않을까. 전통 소재가 가진 특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해 가며 우리 전통의 것이 가진 아름다움이 일상 속에서 더 ‘빛’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원고작성 및 편집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
사진자료 제공 | 강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