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흙내음 바람골에 흩어지다. 도에가 윤광조
  • 흙내음 바람골에 흩어지다.

    설 연휴를 지나고 나니 봄기운이 기지개라도 켜는 듯 옷깃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도 봄소식을 느낀다. 새싹이 올라오는 모습이 반가운 2월 말의 어느 날, 분청사기의 대가라 불리는 급월당 윤광조 도예가를 경주 안강읍 자옥산과 도덕산 자락의 깊은 산골에서 만났다. 그 곳에서 오롯이 자신과 싸움 중인 그와의 대화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집중했다. 뮤진에서 윤광조 선생의 이야기를 담는다.

  • 제자와 함께하는 첫 작품전을 열다.

    지난 1월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이제 모두 얼음이네>전이 열렸다.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더 차다’라는 뜻의 ‘빙수위지 이한어수 ( 氷水爲之 而寒於水 )’라는 한자성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전시 명이다. 전시는 그와 제자들이 함께하는 첫 작품전이다. 그의 제자이자 후배인 변승훈, 김상기, 김문호, 이형석의 분청 작품을 한 자리에 소개했다. 으레 제자와 함께하는 전시라고 해서 유파를 과시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극명하게 엇갈리는 5명의 작품은 분청사기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제자들이 더 낫다는 선생의 겸허한 속내가 들어간 전시에서 짙은 흙 내음이 느껴졌다.

  • 분청사기의 현대화를 이끌다.

    분청사기의 흐름 속에 ‘윤광조’라는 이름 세 글자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한국 분청사기의 현대화에 선도자적 역할을 한 주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를 도예가로 이끈 건 6살 터울의 형이다. 정치가가 되길 원했던 부모의 뜻과 달리 재수 후 홍익대학교 도예과에 합격한 그는 화가 난 어머니의 한 마디에 그대로 가출을 감행했다. 예술가의 가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친구와 형들의 도움으로 학업과 작업을 병행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대학교 2학년 시절 연극부 활동도 했다. 연극부 동아리에 가입 후 마음대로 탈퇴할 수 없었던 그는 군대를 선택했고 자원해 육군사관학교로 향했다.

  • 인생 인연, 혜곡 최순우를 만나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된 그는 업무를 이유로 당시 국립박물관 미술과장이었던 고 최순우 선생을 자주 만나며 가까워졌다. 그는 박물관과 학교 도서관에서 도자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며 궁금한 점은 꼭 메모해 최순우 선생에게 묻곤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최순우 선생은 그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한국 문화 예술의 선구자 역할을 한 최순우 선생은 그가 오늘날까지도 흔들림 없이 분청작업을 하게 하는 정신적인 지주이다.

  • 일본 유학길에서 깨우치다.

    제대 후 1974년 일본 유학길에 나선 그는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작업 방향, 작가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붙잡혀 간 한국 도공들의 자취를 알아보고 그곳 공방에서 문하생을 해보고자 떠났지만 애초 3년 계획한 것과 달리 일년 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일본에는 윤광조 선생 외에도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온 작가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만드는 도자기가 결국 일본화 되는 것을 보고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유학길에 오른 그에게 최순우 선생이 당부한 말 역시 “일본 도예를 배우고 오면 안 된다. 어떻게 가마를 운영하는지 배워라.”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깨달음과 작가로서의 태도를 배우고 온 후 그의 예술은 더 치열해졌다.

  • 버리고 비워야 다시 채워진다.

    청자 흙에 백토를 분장하듯 발랐다는 뜻의 ‘분청사기’는 처음에 분청사기 미학을 정리한 고유섭 선생이 ‘분청회청사기’라는 표현을 했고 이후 최순우 선생이 국제대회 시 ‘분청’이라 명하며 공식명칭을 갖게 되었다. 대학 이후 20여 년간 물레 틀을 이용해 원형 자기를 만들던 그는 작업에 한계를 느끼고 1980년 지리산 전각사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했다. 열흘 동안 하루 3,000배씩 4만 배를 한 후 얻은 것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특별히 무엇인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버려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렇게 물레를 버리고, 형식을 탈피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 윤광조 양식을 만들다.

    고된 수행이었지만 하나를 버리니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물레를 버리고 손으로 길게 뽑은 흙 타래를 쌓거나, 밟거나, 두드려 올리는 방식의 각형 분청에 전념하며 분청사기의 새 시대를 열었다. 볏짚과 삼베를 붙여 굽기도 하고, 지푸라기·나무 등을 이용해 산·강·달· 바람 등을 추상의 이미지로 그려 넣고, 반야심경을 비롯한 시의 구절을 쓰기도 했다. 자유분방한 분청사기의 매력처럼 현대적 감각의 분청사기가 그의 손에서 이끌어져 나왔다. ‘윤광조 양식’의 분청사기는 분청의 미를 높였고 소박의 미, 허식이 없는 우아한 도자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977년 당시 현대화랑에서 열린 젊은 작가 전시에 30대 도예 작가로 참여했고 그가 선보인 전통의 현대화에 해외 유수의 박물관·미술관은 두 손 벌려 환영했다.

  •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다.

    1982~1983년 영국박물관을 비롯한 독일 등 유럽 순회전시, 2003년에는 필라델피아미술관의 동양 작가 최초 전시, 시애틀미술관 등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미와 그 안에 스며든 자신의 철학을 알렸다. 우리의 자연이 그의 손에서 버무려지고 빚어져 역동적 기운, 투박하지만 멋스러움, 오랜 전통의 퇴장이 아닌 자연스러운 재해석을 통해 아름다운 숨결을 내뿜었다. “재료와 숨결은 가까이 있어야 해요. 재료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만이 작가의 내면이 주입될 수 있거든요.” 무엇이든 10년을 하면 자꾸 다듬고, 생동감이 떨어져 안 된다며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다. 그의 작업실 내 10년 주기의 변화를 통해 만든 <심경>, <관>, <카오스>, <산중일기> 시리즈 등의 작품 앞에 서니 자연스레 두 손을 모으게 되고 겸허해졌다.

  • 제자들과 함께

    굽이굽이 산골 속 ‘고독’ ,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순수’ , 멈추지 않는 도전의 ‘열정’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작가의 요소이다. “색깔이 없는 작품은 늘 실망하게 마련이지요. 이제 모두 60대 줄의 제자들이지만,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 이야기한 것도 딱 한 가지요. ‘나를 따라 하지 마라.’라는 것이지.” 네 제자 중 가장 첫 제자였던 변승훈 작가는 “작가로서의 바람직한 태도, 그 점에 대해 가장 많이 배웠지요.”라며 첫 만남을 회상했다. 김상기 작가 역시 “작가로서의 내면세계를 많이 배웠습니다.”라며 “테크닉과 조형 감각도 배웠지만, 그보다도 작가가 지켜야 할 사회적 책임과 윤리와도 같은 ‘도리’를 일깨워줬습니다.”라며 덧붙였다. 작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작가로서의 자세와 태도라는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오늘날까지도 잊지 않고 신념처럼 지켜오는 정신이기도 하다.

  • 분청의 현대적 승화를 이루다.

    혜곡 최순우 선생이 “물속에 잠긴 달을 길어 올릴 만한 기량을 가진 작가”라며 붙여준 급월당( 汲 月 堂 ) 윤광조. “자기 전통에 대한 기본 이해가 있어야 해외 문화도 소화할 수 있다.”라며 전하는 이야기에 가슴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신라에서 보내준 것으로 전해지는 일본 고류지( 廣隆寺 )에 소장된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을 좋아한다는 윤광조. 대화를 나누던 테이블 옆 고가구 위에 놓인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의 사진 속 얼굴처럼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보여준 꾸밈없는 미소가 분청사기 대가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원고 작성 및 편집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

    사진제공 | 가나아트센터(전시 및 작가 프로필 사진)

  • 이미지 퀴즈 배경

    ○○○○는 청자 흙에 백토를
    분장하듯 발랐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감날짜 2018년 5월 14일 ┃ 발표날짜 2018년 5월 15일

    퀴즈 당첨자 발표는 '뮤진을 공유하다' 게시판에서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