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60호



이번 호 뮤진 확대경에서 살펴볼 유물은 <화각함>입니다. <화각함>은 화각 기법으로 만들어진 공예품으로 옷, 예물, 패물 등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화각’이란 소뿔을 종이처럼 얇게 펴 자른 후 물감으로 무늬를 그리고, 무늬가 그려진 면을 나무로 만든 물건 위에 덧붙여 장식하는 전통 목공예 기법의 하나입니다. 화각은 여러 가지 단청 물감을 사용하는 등 제작 과정이 어렵고 복잡하지만, 색채가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해 주로 여성 공예품으로 규방에서 즐겨 사용했습니다. 여러 문양으로 장식된 <화각함>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이 <화각함>은 적색 바탕에 여러 문양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화각 공예에는 주 재료인 소뿔의 성질에 적합하며 발색이 잘 되는 적 · 청 · 황 · 백 · 흑색을 기본으로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화각함의 주조색은 적색과 황색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는데 뮤진 확대경에서 살펴볼 <화각함>은 적색 바탕을 기본으로 합니다. 적색은 높은 계급을 상징하는 색으로 ‘신성의 색’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화각에서 적색은 다른 색과 조화를 이루면서 문양을 잘 드러나게 해 효과적입니다. 각 면에 그려진 그림 윤곽선을 흑색으로 그린 것도 눈 여겨 살펴봐야 할 부분입니다. 이는 그림을 더 선명하게 해주며 통일성 있는 질서미를 구현합니다. 섬세하면서도 세련되고 안정된 구도에 장식성까지 자랑하는 <화각함> 을 확대해봅니다.

<화각함> 전면에는 함을 여닫을 수 있는 문짝이 있으며, 전면과 측면은 삼단 구성으로 되었습니다. 먼저 상단에는 여러 면에 걸쳐 모란꽃 문양을 그렸습니다. 정면에 장식된 모란은 꽃과 잎이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그려졌으나 측면은 줄기 부분까지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부귀와 화목을 상징하는 모란꽃은 여성들이 사용하는 물건에 자주 사용된 문양입니다. 화각 공예 외 여러 장르에서 표현되었으며 사회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도 상하계급 구별 없이 보편적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에서 선호하는 문양은 학, 사슴, 거북이입니다. 특히, 사슴은 남녀차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문양으로 <화각함>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왼쪽 함 중단에는 사슴을 탄 동자승의 모습이 있으며 오른쪽 함 하단에는 푸른 소나무 앞에 서 있는 사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인 사슴의 뿔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데 이 뿔 모양 때문에 신의 뜻을 감지하는 신성한 매개체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슴 위에 앉아 있는 동자승의 모습은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자연에서 노니는 도교적 성격의 소재이며 동물 위에 앉은 동자승의 모습은 화각 공예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전면에 호랑이 문양이 반복되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술에 다양하게 등장하는 동물 중 하나인 호랑이는 권세와 용맹의 상징이며 군왕의 표상으로 즐겨 사용되었습니다. 중단과 하단에 표현된 호랑이문은 기상과 힘이 느껴지는 듯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동시에 익살스럽고 무서운 기색 없이 순진해 보이는 민화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느낌으로 그려졌습니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벽화나 석상에 주로 호랑이가 많았지만, 이후에는 공예, 자수할 것 없이 폭넓게 다루어졌으며 용도에 따라 모습과 표정이 다양합니다.

전전면과 측면에 여러 마리의 학이 있습니다. 학은 그 수만큼 다양한 자세를 드러내며 사슴과 더불어 십장생 소재 중 하나입니다. 날개를 펴 날고 있는 학은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며, 서로 다정하게 바라보는 한 쌍의 학은 잉태(孕胎)를 뜻하는 것입니다. 학은 매우 신비한 존재로 천 년 이상 산다고 하여 장수를 상징합니다. 또 다른 새와 달리 조용히 은거하는 모습에 현자(賢者)를 뜻하기도 합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여성적 문양으로 학이 지닌 우아하고 청초한 모습 때문에 장식적인 소재로 많이 사용됩니다.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덮개 부분은 이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모서리에는 태극 문양이 있습니다.
태극문은 우주 만물 구성의 가장 근원이 되는 것으로 음양이원론에 입각해 모든 것이 변화, 생성되고 새로워져 발전과 번영을 한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삼태극(三太極)으로 그려진 태극 문양은 하늘, 땅,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서로 의존하고 융합함을 나타냅니다.

<화각함>에는 위에서 살펴본 것 외에 용, 거북이, 잉어 등 동식물 문양, 길상 문양, 십장생 문양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양들은 여느 공예품처럼 민예적이며 해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보편적 미의식이 표출된 문양이 상류층에서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적인 감수성이라는 공통분모와 민간신앙이라는 집단 감정 형식이 계급과 상관없이 통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화각 공예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통 요소를 공예품에 적용하여 독창성 있게 제작된 조선 시대 후기 규방 용품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좋은 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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