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60호


하늘을 찌르는 듯한 매미 소리, 아이들의 물놀이 소란이 한바탕 지나고 나면 우리는 가을의 문턱에서 여름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낀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타고 여치, 귀뚜라미 등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형형색색 울긋불긋 단풍이 눈동자에 담기기 시작하면 마음속 어딘가 고이고이 담아 둔 지난 기억을 한 번쯤 꺼내보는 낭만을 찾게 된다. 누구에게나 박물관에 관한 추억은 하나씩 있을 것이다. ‘나를 추억으로 이끄는 박물관’은 어떤 모습일까? 그 추억 속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펼쳐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초등학교 시절 혹은 그 이전부터 견학으로 찾는 단골 장소 중 한 곳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박물관은 굉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박물관의 규모도 적지 않긴 마찬가지다. 넓고 웅장한 규모에 한 번 놀라고 내부로 들어가면 유물과 그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박물관이 주는 공간의 추억은 또 있다. 시간을 거슬러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 시절부터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박물관은 중앙청, 성인이 된 후 박물관은 지금의 용산이라 말할 것이다. 옛 중앙청 시절 박물관의 바닥은 돌로 되어 있었다. 그 바닥 위를 걸으면 ‘또각또각’ 나는 발걸음 소리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중앙 홀 천장에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유리창의 모습을 눈감고 그려보기도 한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해체되어 이제는 흑백필름 같은 오래된 추억이다.

개개인에게 박물관이 만들어준 기억이나 느낌은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박물관 종사자로서 혹은 일반 관람객으로서 미술 전문가로서 등등… 명지대학교 유홍준 교수는 『국보순례』 (눌와, 2011)를 통해 여러 유물에 얽힌 그만의 추억과 에피소드를 회상한다. 그는 <백자 철화 끈 무늬 병>을 통해 영남대 재직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는데, 내용인즉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도자기 한 점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라는 문제를 시험에 출제했고 한 학생의 답안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저는 백자 넥타이 병이 최고라 생각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 학생은 백자의 끈 무늬를 넥타이라 본 것이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통해서는 법정 스님을 추억했다. 2010년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 기거하던 강원도 집에 걸린 사진이 바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었는데 그리 유명하지 않은 불상이지만 철불을 보면 법정 스님이 떠오를 것 같으리라 회고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간되는 사외 보 『월간 박물관』에 실린 ‘박물관人 일기’라는 칼럼을 통해 보존과학부 전효수 학예연구사는
<천마총 금관>을 보며 전시를 위해 호주에 간 추억을 떠올렸다. 현지 담당자와 기 싸움을 통해 전시장 습도 조건율을 낮추었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박물관에서 보낸 시간 동안 소중한 기억이 많다.”라고 하였다. 한 관람객은 “전시관을 돌며 유물을 볼 때마다 자신만의 상상력을 펼치죠. 조상들이 생활 속에서 사용했을 도구나 물건을 보며 당시 모습을 그려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역사 속 장면 속에 제가 주인공이 되어 있어요.”라고도 했다. 박물관 블로그 기자인 황국진 씨는 “박물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블로그 활동을 하며 ‘소통의 중요성’을 배웠다.”라며 박물관을 추억하고 있다.

여행의 추억을 박물관에서 찾을 수도 있는데 특히 그곳이 해외라면 추억은 자석처럼 강하게 이끌 것이다. ‘폴란드, 천 년의 예술’,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세미술관’ 전 등의 해외미술 관련 기획특별전시가 대표적이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작품을 통해 여행의 추억이 더 깊어짐을 느낀다. 관람객 김안나 씨는 폼페이 유물전을 보며 “오래 전 이탈리아 폼페이 지역을 여행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작정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전시를 보는 동안 폼페이의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오르세미술관’ 전은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각자의 유럽여행에서의 추억을 회상하기 바빴고 어떤 이들은 여행을 떠난 듯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여행의 값진 추억과 깨달음을 작품 앞에서 꺼내보고 혹은 곁에 있는 누군가와 공유하며 평범한 하루를 추억으로 물들인다.

지난 6월 개봉한 ‘우먼 인 골드’라는 영화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를 놓고 펼쳐지는 이야기로 한 여인이 가족의 추억이 담긴 이 그림을 되찾고자 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극 중에서 여인이 되찾고자 한 것은 단순히 그림이 아닌 가족과의 추억이었다.
박물관 1층 으뜸 홀에는 ‘역사의 길’이 있다. 이 길을 걸으며 박물관과 함께 한 여러분만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또는 문화로 더욱 풍성해진 박물관을 찾아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보는 것도 가을을 더욱 깊게 해줄 것이다. 박물관에서 보내는 시간을 좀 더 오래 추억하기 위해 사진 한 장 남기는 것도 좋다. 언젠가 ‘오늘’을 추억하는 순간이 올 테니 말이다. 박물관에 얽힌 추억은 울긋불긋 물드는 가을 낙엽만큼 여러 가지 색으로 수놓아질 것이다. 보름달처럼 선명하고 환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더하는 박물관의 가을밤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