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7호


유물박사 교실

뮤진 유물박사 교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곳은 뮤진 사이버 박물관에서 만나보았던 <E-특별전>과 <뮤진 확대경>을 또 다른 시각으로 만나보는 공간입니다. 우리 문화가 지닌 다채로운 매력 속으로 지금 들어가 볼까요?

이번호 뮤진확대경에서는 <백자 매화 대나무 새무늬 항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항아리 표면의 그림은 푸른색 안료인 청화(靑華)로 그렸는데 그 안료가 당시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 청화백자라면 그 자체로 고급의 도자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도자기의 표면에는 사군자(四君子)에 속하는 매화그림이 그려졌습니다. 매화는 매우 사랑받는 그림의 소재로, 새 두 마리와 함께 묘사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E특별전에서는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종이와 붓에 관련한 주변 문방구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붓과 종이는 만드는 과정이나 재료 등 살펴볼 거리가 많은데, 특히 붓은 여러 가지를 갖추고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선택했으며 사용법도 다양합니다. 이번호 유물박사에서는 도자기에 그려진 푸른 그림과 매화의 의미 그리고 붓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중국의 명나라 청화 발달에 자극받은 우리나라에는 14세기 말엽 전래되었고 15세기 중엽부터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청화백자의 청색 안료는 이슬람에서 중국으로 수입되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을 回回(회회)라 했기에 ‘회회청(回回靑)’이라 했는데, 이것이 천연 코발트입니다. 청화백자의 백자유와 코발트의 섬세한 발색의 어울림은 서로 상승효과를 발휘하여 조선후기 도자사의 큰 맥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회회청을 수입해 사용하였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 사용을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는 관리가 청화백자를 사용하면 곤장 80대에 처한다는 규정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하니 청화백자는 그야말로 부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세조(世祖)임금은 국내에서 이 안료를 구하고자 하여 상금이나 벼슬을 내걸기도 했지만 구해 온 것으로는 회회청의 코발트 블루를 표현하기엔 부족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9년(1463) 5월 24일의 기록에 의하면 특수임무를 띠는 특명관인 경차관이 회회청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다른 지역에 관한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전국에서 회회청을 구하는 것을 특명으로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국내에서 회회청을 구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수입하였고 안료는 매우 절제해서 사용하게 되었고, 왕실의 화원들이 직접 도자제조소인 광주 분원에서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것은 재료가 귀하고 생산에 제한을 두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청화의 발색이 무척 예민하여 빠른 시간 안에 그림을 그려야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청화백자는 코발트 안료로 표면에 그림과 무늬를 그린 뒤 1300도 이상 굽습니다. 1000도 이상의 열에서는 흙이 무너지거나 안료가 변색될 수 있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력과 감각이 필요합니다.
귀하고 수량이 적었던 청화백자는 조선말기에 이르러 회회청의 수입이 원활해지자 대중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에서 대량생산하면서 안료 가격이 저렴해졌고 이에 따라 종류와 형태가 다양해지고 그림의 내용도 변하였습니다. 수와 복을 비는 마음을 담은 여러 글자와 십장생(十長生) 등이 도자기 표면에 그려져 19세기에 일어난 조선 사회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매화는 사군자 중 하나로 봄을 뜻합니다. 꽃이 피는 순서를 춘서(春序)라고 하는데, 당나라 백낙천(白樂天)은 〈춘풍(春風)〉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앞서 봄을 알리는 특징은 매화의 다른 이름들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일찍 핀다고 하여 조매(早梅), 추운 겨울에 핀다고 하여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고 하여 설중매(雪中梅), 봄소식을 전한다 하여 춘매(春梅)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이름을 통해서도 매화가 봄을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겨울이라 할 만큼 추운 시기에 피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 뿐 아니라 매화의 여러 가지 상징에서도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매화는 선각자, 고결한 선비정신, 절개를 뜻합니다. 추위와 수분의 부족 가운데서도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는 모습은 고난과 압박을 이기고 해방과 자유를 추구하는 형상으로 빗대어 표현됩니다. 또한 ‘기품’, ‘품격’이라는 꽃말을 가진 만큼 선비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매화나무는 겨울을 견딘다하여 세한삼우(歲寒三友)라고 하며 그 중 매화는 맑고 밝은 꽃과 향기 때문에 선비나 화가들의 시·서·화에 늘 등장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임종 직전에 매화나무를 돌볼 것을 당부했을 만큼 매화 사랑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매화사랑은 죽을 때까지 92제 107수의 매화시를 썼고 그중 62제 71수를 모아 <매화시첩>이란 책을 엮었을 정도입니다. 《퇴계집》 중〈호당매화(湖堂梅花)〉라는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매화를 찬양했습니다.

퇴계 이황 외에도 정도전(鄭道傳)은 그의 《삼봉집(三峯集)》의 〈매천부(梅川賦)〉에서 선비의 고결한 인품을 매화에 비유하여 표현하였고, 조선 세조 때의 성삼문(成三問)은 자신의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고 하였습니다. 권력을 멀리하고 고고한 인품으로 지조와 절개를 마음에 품은 선비가 매화를 사랑하고 묘사한 사례를 보니 매화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매화는 이러한 선비정신 뿐 아니라 여인의 정절, 순결을 상징하기도 해서 양반가의 여인들은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시문한 비녀 매죽잠(梅竹簪)이나 매화가 시문된 장도를 즐겨 착용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인내와 기다림이라는 미덕이 매화로 형상화 되었습니다. 현모양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은 매화를 즐겨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습니다.
사랑과 그리움 역시 매화를 통해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매화나무의 가지에 새가 함께 표현되는 경우를 뜻하는데 그 새는 휘파람새입니다. 고려때 그릇을 만드는 도공이 결혼식을 앞두고 약혼녀가 죽자 실의에 빠져 있다가, 약혼녀의 무덤에 돋아난 매화를 뜰에 옮겨 심고 아끼며 돌보았습니다. 도공은 자신이 없을 때 매화를 돌볼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였는데 그가 실제로 죽은 후 옆에서 발견된 작은 그릇을 사람들이 열자 새가 나와 매화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전설은 휘파람새가 사랑하는 이가 죽었어도, 본인이 죽어서도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지며 매화가지에 앉은 새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붓은 그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서기전 3세기에 진(秦)나라의 몽염(蒙恬)(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증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기 史記≫의 몽염열전(蒙恬列傳)에는 몽염이 서기전 221년 진나라의 천하 통일 후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인데, 내사는 국가의 법전을 관장하며 조서(詔書) 및 궁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을 말합니다. 공문서의 기초나 서사·복제 따위의 일을 맡은 직책이었으므로 기존에 이미 있던 붓을 개량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중국 송대(宋代)의 소이간(蘇易簡)은 저서 ≪문방사보(文房四寶)≫에서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자기들의 치세(治世) 동안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발명설을 주장한 것 같다.”고 비평하는 등 몽염이 붓을 발명했다는 것보다 개량했다는 쪽으로 무게가 실립니다. 이는 발견된 유물을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은나라의 갑골문자를 보면 처음에 나뭇가지나 댓가지에 먹을 묻혀 먼저 글씨를 쓰고 새긴 것으로 추측됩니다.
붓은 죽필(竹筆)·고필(藁筆)·갈필(葛筆) 등 특수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짐승의 털을 추려 모아 만들었습니다. 양·여우·토끼·호랑이·사슴·산돼지·살쾡이·이리·담비·개·말 등의 털을 사용하였는데 이 털들을 원추형으로 만들어 필관(筆管)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필관은 대개 대나무를 쓰지만 나무·골각·보옥·금은·도자 등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붓은 모양과 용도에 따라 장봉(長峰)·중봉(中峰)·초필(抄筆) 그리고 심을 박은 것과 박지 않은 것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털의 길이가 긴 것을 장봉(長鋒), 짧은 것을 단봉(短鋒), 보통의 것을 중봉(中鋒)이라 합니다. 심을 박은 것을 유심필, 그렇지 않은 것을 무심필이라고 합니다. 심을 박는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털로 속을 채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심필은 탄력이 있어 초심자가 힘 있는 글씨를 쓸 때 사용합니다. 보통 무심필이 탄력이 낮지만 붓의 사용이 능숙한 경우 더욱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붓은 매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사용한 후에 반드시 씻어두어야 합니다. 먹이나 먹물 제조 과정에 들어가는 아교는 붓을 굳게 하여 붓이 갈라지는 등의 손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붓을 실온의 물에 담가 흔들어 먹물을 제거하고 붓과 필관이 만나는 윗부분까지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 후 털이 위로 가도록 세워 말리면 곰팡이가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붓 끝을 모아 아래를 향하도록 걸어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말립니다. 이 때 주의할 것은 비누나 세제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번호 유물박사에서는 청화, 매화의 상징 그리고 문방사우 중 붓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청화의 안료가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매우 고급스러운 재료였다는 점과 예민함 때문에 섬세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처럼 다양한 색이 산업을 통해 만들어져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양한 의미를 담은 청화백자의 가치가 더욱 높게 느껴집니다. 뮤진확대경에서 소개된 청화백자 항아리에는 매화와 그 가지에 있는 두 마리 새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매화의 상징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새가 함께 표현되는 매화는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전설이 있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다음으로는 우리의 전통 문방구인 붓을 살펴보았습니다. 요즘은 일상에서 붓을 쓰고 관리할 일이 없지만, 다양한 유물을 살펴보면 우리의 선조들에게 항시 붓을 곁에 두고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비록 현대의 우리가 직접 안료로 도자기에 상징이 있는 그림을 그리거나 매화를 심어두고 아껴주거나 붓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박물관이나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청화백자와 매화그림 그리고 서예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면 우리의 문화재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