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들어 일상생활을 하면서 쓰는 모든 글씨를 예술로 여기지는 않지만, 만년필, 붓을 이용하여 다양한 글씨체를 연습하고 카드를 쓰거나 메시지를 전달할 때 미적인 부분도 신경을 써서 글을 씁니다. 만년필이나 붓은 이전에는 일상에서 사용하던 문구로, 그것으로 쓴 글씨에 특징이 있어 세심하게 사용할수록 그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할만한 멋진 글씨가 나오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만년필이나 붓으로 글씨쓰기를 연습합니다. 과거 동양에서는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아 붓에 묻혀 글씨를 썼습니다. 용도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붓을 사용했는데 지금처럼 뚜껑을 열거나 버튼을 누르듯 한 번에 글씨를 쓸 수 있게 준비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주변에 붓을 위한 물품들이 함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담는 종이도 매우 중요합니다. 젖은 상태에서 글씨가 쓰이기 때문에 수분이 너무 번지지 않아야하고, 종이의 결이나 흡수속도, 마르고나서의 형태에 따라 신중하게 선택했을 것입니다. 또 한 번 쓰면 고쳐 쓸 수 없는 종이에 세로쓰기로 편지를 쓰려면 격식 있는 문장만큼 한 눈에 보이는 글자의 배치나 균형 등도 고려했습니다.이렇듯 우리의 서예는 물품도 갖추어야 하고 그만큼 신중함도 요구되었습니다. 자세를 갖추고 한 자리에서 글씨를 써나가기 위하여 준비되었던 문방사우와 주변용품 중 붓과 종이에 관련된 유물을 이번호 E특별전에서 만나보겠습니다.
선비들은 언제든 글을 쓸 수 있도록 곁에 문방구를 두었는데, 그 중 붓은 보관방법이 매우 다양했습니다.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기도 하고, 필갑이라는 서랍이나 필통에 넣어두기도 하였으며, 걸어 보관하거나 꽂아두기도 하였습니다.
이 청자 투각 용머리 장식 붓꽂이는 붓을 사용하다가 혹은 마른 후에 꽂아 보관하는 용도의 문방구입니다. 상단에 붓을 꽂을, 수 있는 세 개의 구멍이 있고 그 좌우에 세밀하게 묘사된 용머리가 있습니다. 양각으로 표현된 용머리는 고개를 쳐들고 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어 이 붓꽂이 전체의 기세를 높이고 있는데 특히 철화로 눈동자를 표현하여 생동감을 부여하였습니다. 붓을 꽂는 구멍 주변은 연판문(蓮瓣文)을 음각으로 새겼는데, 연꽃잎 무늬를 도안화 한 연판문은 그 물건의 청정함과 뛰어남을 표현하고자 할 때 쓰입니다. 몸체의 전면과 후면에 투각된 연당초문은 일정한 면에 형태만 뚫어 표현한 것이 아니라 줄기와 잎 등이 그 특징을 드러내면서 세밀한 곡면을 드러내고 있어 놀랍습니다. 받침대는 면에는 선을 반복하여 표현하였고 가장자리는 곡선의 형태로 마무리하여 파도같아 보이는 한 편 용과 함께 자주 묘사되는 구름 같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고려청자에 용, 구름, 연꽃이 양각, 철화, 음각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되다니 이 하나의 붓꽂이에 얼마나 깊은 마음과 정성을 담았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붓을 사용할 때 물의 사용은 필수입니다. 먹을 갈기 위해서도 분명 물이 필요하지만, 사용한 붓은 반드시 씻어 말려야하기 때문에 붓을 씻을 물도 꼭 필요했습니다. 큰 양동이나 물을 담을 수 있는 용기 아무것에라도 붓을 넣어 씻을 수 있겠지만 어떤 내용을 쓰든 글씨를 쓸 때 갖추어야 할 자세와 원칙이 있었던 서예는 당연히 정갈하면서도 격이 있는 방식으로 붓 씻는 물을 준비했습니다.
붓 씻는 그릇은 한자로 필세(筆洗)라고 하는데, 이 백자필세는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그 형태가 다른 필세와 확연히 차이를 보입니다. 백자 문방구는 조선 중기에 눈에 띄는 성장을 하여 세련된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조선조 500년의 백자 중 가장 견고하고 실용적인 조선 후기의 백자 중 문방구는 다른 그릇들에 비해 기벽이나 유약이 덜 두꺼웠습니다. 이 시기의 백자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새로운 형태로 더욱 다양해졌는데, 이 백자 필세의 형태도 이러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사각형의 물을 담는 통의 사면에서 휘돌아나가는 태극모양으로 형태를 확대했는데, 이것은 위에서 보았을 때 잎이 촘촘히 피어나기 시작해 이제 곧 활짝 필 꽃을 보는 듯합니다. 필세의 가장자리에는 꽃잎을 묘사한 듯 홈이 있고 물통의 뚜껑 손잡이가 연봉형(連峰形)이기 때문에 심지에 봉우리가 남아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채색 없이 깨끗하고 단아한 백자에 이러한 세심함이 있는 형태를 갖춘 이 필세는 절제와 귀품을 동시에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글씨를 쓸 때나 전통 수묵화를 그릴 때 쓰는 종이는 길이가 긴 경우가 많습니다. 종이는 가볍고, 길이가 길기 때문에 자칫 조금만 스쳐도 종이가 움직입니다. 그럴 때 종이가 날리지 않도록 눌러 놓는 문방구가 바로 문진(文鎭)입니다. 문진은 다른 이름으로 서진(鎭)이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진지(鎭紙), 압척(壓尺)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진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이 많지만 그 외에도 동그란 것, 납작한 것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재료의 경우 돌·나무·수정·옥·은·동·놋쇠 등이 주로 쓰였습니다. 문진의 경우 다른 문방구에 비하여 꾸밈이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장식이나 꾸밈이 있는 경우 용·두꺼비·호랑이 등 동물이나 산수를 표현한 것도 있지만, 소개해드리는 이 문진처럼 표면에 금이나 은을 입사(入絲) 하기도 합니다. 이 철제은입사문진의 표면은 동물문과 편복문이 표면전체를 감싸고 장식되어 있습니다.
얇고 가벼운 종이를 꺼내어 펼치고 그 시작과 끝에 묵직한 문진을 올려두면 그제야 반듯이 펼쳐진 종이 위에 더 바른 글씨나 유려한 그림을 그릴준비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 듯합니다.
편지는 분량에 비해 쓰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곤 합니다. 그것은 문장이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기에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글을 세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고, 붓에 먹물 적셔 사용했기에 붓이 머무는 시간과 붓의 젖은 정도에 따라 종이의 질이 확연히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종이는 주로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만드는데, 심은 지 3년 된 닥나무를 베어 가을에 쪄서 껍질을 벗겨냅니다. 흐르는 물에 씻어낸 후 방망이로 두들겨 죽처럼 만들고 습지 위에 놓고 널빤지로 눌러 물기를 제거한 뒤 말려 종이를 완성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조지서(造紙署)가 설치되어 관에서 종이를 생산하였는데 새로운 제지법을 연구하고 종이 질의 개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용재총화(怡齋叢話)』에는 세종 때 흰 종이 뿐 아니라 여러 빛깔의 좋은 종이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적(赤)·청(靑)·황(黃)·백(白)·흑(黑)의 다섯 가지 기본색 외에 2∼30여 가지의 색상이 있다고 합니다. 종이를 염색 할 때는 반죽에 여러 식물 염료를 넣어 끓인 후 종이를 만드는 선염법(渲染法)과 한지에 갖가지 염료를 물들이는 후염법(後染法)이 쓰였습니다.
정조 중엽 이전에는 색지를 쓴 흔적은 없지만 고관대작이나 부유층이 간혹 색지나 색 두루마리를 사용했다고 하니 이 서간지(書簡紙)는 아마도 부유층의 문인들이 사용하던 것일 듯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서간지의 종류도 다양했는데 보통은 짙은 남색의 감지(紺紙)를 많이 썼으며 2~3cm 정도 간격으로 세로선을 넣고 끝에 산, 수목, 난초 등을 목판 인쇄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붉은색으로 인화(印畵)한 편지지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운 편지지에 마음을 담아 보낸다면 편지를 받는 사람의 기쁨이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문인들의 서재라는 의미에서 그 서재에서 쓰는 도구로 의미가 변한 ‘문방(文房)’은 선비들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끼고 바라보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먹, 벼루, 종이, 붓을 문방사우(文房四友)라 칭하며 친구관계에 빗대어 표현했을 것입니다. 이 문방사우 뿐 아니라 붓을 씻고, 꽂고, 걸기도하며 종이를 고정하는 등 다양한 용도의 문방구가 관심과 사랑을 받아 그 종류도 늘어났습니다. 모양과 재료에 정성을 다하여 하나하나 제작한 문방구는 이제 우리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며 서예나 전통회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필통에서 필기구를 꺼내어 종이에 쉽게 글씨를 그리고 지우는 것보다 종이와 붓을 준비하고 먹을 벼루에 갈아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분명히 더 많은 용구를 챙겨야하고 번거로웠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 하나하나에 신중함과 애정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앞으로는 짧은 글씨와 작은 그림에도 그런 마음을 담아보리라 다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