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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ZINE

57호


안료 관요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항아리 형태입니다. 입 부분이 곧게 서 있고 어깨가 벌어진 몸체에 뚜껑을 갖췄습니다. 여기에 푸른빛이 감도는 맑은 투명 유약을 입혔는데, 몸체 측면과 아래에 부분적으로 유약표면의 작은 금이 보입니다.
이 항아리에서 가장 중심적인 화면은 매화나무 위에 새 한 쌍을 표현한 것입니다. 입 주위로 한 줄의 선을, 아래에는 두 줄의 선을 둘러 구획된 화면을 마련하고, 바라봤을 때 좌측으로 뻗어나간 두 갈래의 매화나무 가지 위에 서로 마주하고 앉은 한 쌍의 새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청화 안료의 색은 다소 짙고 안료가 뭉친 부분은 검은 색을 띱니다. 입 주변에는 여러 개로 나열된 와선형(渦線形)의 작은 원들이 부속 무늬로 그려졌으며, 끝 부분은 굴곡 있는 단선으로 처리하여 마치 한 조각의 구름이 몰려가는 듯한 표현을 세 곳에 두었습니다. 새 한 쌍을 중심으로 봤을 때 우측에 자리한 굴곡진 나무줄기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좌측으로 향한 긴 가지 끝에 우측을 바라보는 한 마리의 새가 앉아 있고, 우측으로 향하다가 다시 좌측으로 뻗은 짧은 가지 위에 맞은편을 바라보는 새 한 마리가 배치되어 주된 화면을 이루었습니다.
나무는 몰골법(沒骨法)을 주로 사용 하였고 줄기와 가지 일부를 구륵법(鉤勒法)으로 표현 하면서,잔가지 마다 만개한 매화를 강조하면서 군데군데 봉오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나무 전체와 꽃망울의 비례가 맞지 않게 매화가 과장되게 그려졌고 이는 마주한 새들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지만, 대상의 특징을 능숙하게 다룬 솜씨는 잘 살아 있습니다. 다만 꽁지가 긴 새의 모습은 청화 안료가 검게 뭉쳐 세부 묘사가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매화나무 아래에 일반적인 매조죽문 구성에서 볼 수 없는 들꽃 군락을 화사하게 그려 뚜렷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나무줄기 아래의 주변으로 좌측에 다섯 송이, 우측에 세 송이의 들꽃을 그렸는데, 좌측의 청초한 꽃들이 미풍에 자연스레 흔들리듯이 사선과 수직을 이루어 감상자의 시선이 가지 위 새들과 부드럽게 연결됩니다.
이처럼 백자에 표현된 들꽃 계열의 무늬는 이후 철화나 청화 안료로 표현된 들꽃 무늬의 예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화, 새, 들꽃이 그려진 맞은편에는 우측으로 완만한 사선을 이루는 가는 대나무(細竹)가 주축을 이루면서 그 아래에 낮게 드리워진 굵은 대나무 줄기를 그려 넣어 여유 있는 공간에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댓줄기는 다소 여리게 표현되었지만, 밀집된 댓잎의 생동감과 날렵함이 살아 있어 전체적으로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대개의 뚜껑을 갖춘 도자 기종이 그렇듯이 몸체에 장식을 하면 뚜껑에도 이와 어울리는 무늬가 베풀어져 몸체와 조화를 이룹니다. 뚜껑의 형태는 안쪽에 2cm 가량의 촉이 부착되어 항아리 위에 덮었을 때 잘 맞물리도록 하였고, 꼭지는 연봉오리 형태로 만들어 세부를 꽃잎처럼 그렸습니다.
뚜껑 윗면의 청화 장식은 뚜껑의 둥근 형태에 따라 꺾이듯 묘사된 매화 가지와 이를 받쳐주는 댓가지의 구성이 감각적입니다. 우측의 매화 가지는 꼭지의 주변을 마치 갈고리처럼 둘러 좁은 가운데에서도 동세(動勢) 표현이 뛰어나고, 좌측 아래에는 짧지만 탄력 있게 솟은 댓잎들이 이에 호응하듯이 펼쳐졌습니다. 매화 가지와 댓가지의 원만한 어울림으로 묘사한 대상뿐만 아니라 공간 전체에 생기가 돕니다.

백자는 유교적 이념이 구현된 조선 문화의 대표적 산물로, 15세기 후반 왕실과 중앙 관청용 백자 제작을 전담한 ‘분원(分院)’이 설치됨에 따라 조선 백자의 토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련된 고급 백자의 생산이 진척되면서 조선 백자는 절제된 순백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의 무늬가 장식되기에 이릅니다. 조선시대 백자 장식은 같은 시기의 분청사기나 고려시대 청자에 비해 기법이나 소재 면에서 다소 단순한 편입니다. 새기거나 도장으로 찍는 방법이 아닌 대개 붓으로 그리는 기법이 중심이 되었는데, 시문된 안료의 색에 따라 푸른색의 ‘청화(靑畫)’, 흑갈색의 ‘철화(鐵畫)’, 붉은색의 ‘동화(銅畫)’로 나뉘고, 유행 시기도 대체로 구분됩니다. 특히 순백자 위에 코발트 안료인 ‘회청(回靑)’을 사용하여 푸른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청화 기법은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주요한 장식 방법이었습니다. 청화는 문자 그대로 푸른색의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의 청화백자는 대개‘靑花’라 지칭했던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청화백자를 일컬어 이와 같이 쓰입니다.
반면 조선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는 대체로 ‘靑畫’라고 표기하여 중국에서 들여온 것과 구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청화 안료는 중국으로부터 비싼 값에 수입하여 귀하게 여겼던 것으로, 도화서 화원이 주로 그림을 담당하였고 이로 인해 청화백자로 제작된 수량 또한 많지 않았습니다. 청화 장식이 시도된 초기에는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운룡문, 꽃넝쿨문(花唐草文), 송죽매문(松竹梅文), 어조문(魚澡文), 천마문(天馬文) 등이 장식되다가 시문(詩文), 매조죽문(梅鳥竹文)처럼 조선적인 미감이 드러나는 무늬가 등장하게 되며, 그 밖에 문자문(文字文), 포도문, 초화문, 초충문 등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 중 매화나무, 새, 대나무의 세 가지 소재가 한데 어우러진 매조죽문은 항아리처럼 장식 공간이 넉넉한 기종에 정취 있게 묘사되어 많지 않은 청화백자 중에서도 선호되었던 무늬로, 백자 청화 매화 대나무 새 무늬 항아리(국보 170호 높이 16.5㎝)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백자 매화 대나무 새무늬 항아리는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사상과 미감이 우러난 청화백자의 성향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이는 조선 왕실과 사대부의 격조 높은 기상과 정서가 매화나무와 새, 들꽃, 대나무로 표상되어 백자 항아리에 오롯이 담긴 것이자, 조선 백자 문화의 진정한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