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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ZINE

58호



이번 달 뮤진 확대경에서는 꽃 유물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 문인들은 자연을 소재로 작품을 많이 남겼고 그중에서도 ‘꽃’은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였습니다. 꽃을 새, 벌레와 함께 그린 화조화와 초충화가 많고 꽃과 풀 또는 꽃 피는 식물만 그린 것은 화훼화라고 합니다. 화훼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시각화하여 미의식으로 반영하였고 그 정신 그대로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꽃을 그림으로 나타낼 때 향기는 없고 생명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지만, 선인들의 미의식은 살펴보기엔 충분합니다. 좀 더 다양한 꽃의 아름다운 향기에 빠지기 위해 <사이청향(四李淸香)>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첫 번째 나오는 화훼는 바로 행화(杏花), 살구나무입니다. 분홍빛으로 봄을 부르는 듯한 꽃은 먹 자체의 사용은 최대한 자제하며 대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꽃의 개화 정도를 색의 농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교한 필선은 군더더기 없이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만개한 꽃잎과 꽃봉오리가 조화를 이루며 꽃 가지의 수에서 안정감과 균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느 한 곳으로 치우쳐짐이 없으며 꽃은 마치 화폭이 펼쳐지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게 해주며 전체 구성에서 답답함을 없애며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장미꽃은 채색을 사용하여 꽃잎의 명암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장미는 청춘, 사랑,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하는 꽃 중 하나입니다. 꽃과 꽃잎을 나타내는 부분에서 감각적인 색채 처리를 느낄 수 있으며, 안료인 호분을 사용하여 볼륨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지와 꽃잎의 표현 역시 매우 세밀하게 그렸으며, 색을 통해 명암을 나타냈지만 화려하고 사실적인 특징은 짙은 채색을 통해 두드러집니다. 관람객의 시선이 화폭 전체로 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동 시점의 방법은 구도와 배치를 더욱 자유롭게 하며 공간의 풍성함 등을 만들어 줍니다.

모란꽃 역시 장미꽃처럼 꽃잎 명암을 표현하였고 색채는 더욱 은은한 백색 빛이 돌고 있습니다. 안료인 호분을 두텁게 사용하여 꽃의 양감을 사실적이면서 화려하게 그렸습니다. 꽃 중의 왕으로 불리는 모란은 부귀화(富貴花), 화중왕(花中王), 부귀초(富貴草), 화신(花神)이라 불릴 만큼 상징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꽃잎 가장자리 잎 처리 부분의 선과 색 농도 사용의 조화를 통해 조형성을 추구하였고 그림에 깊이 감을 부여하면서 생동감까지 표현했습니다. 먹으로 다소 짙게 표현된 가지와 잎의 채색으로 모란꽃의 형상은 더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모란꽃은 여운을 간직한 채 그려져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줍니다.

국화는 한 가지 모양이지만 이 화폭에서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한 가지 꽃이면서도 다양한 채색으로 표현한 것이 눈에 띕니다. 색의 농도와 대비를 통해 작품의 생기가 느껴집니다. 국화는 봄, 여름을 지나 늦가을 서리를 맞으며 홀로 피는 꽃으로 절개를 지키면서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숨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매끈하고 간결한 선의 표현으로 꽃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를 해주면서 힘있게 채워진 국화의 사실적인 묘사와 채색에 대한 대비는 꽃의 본질을 매우 조형적으로 나타내주었음을 보여줍니다. 더불어 줄기와 잎 표현에서 먹색에 가까운 채색으로 표현해주면서 화면 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 모란과 함께 작품의 무게감과 균형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매화의 의미가 변화하여 지조의 상징으로 인식되던 전통적 의미에서 벗어나 독특한 예술 취향의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아름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매화의 섬세한 표현과 그림자처럼 뻗은 가지는 멀고 가까운 거리감과 더불어 여백의 아름다움을 더 풍부하게 해줍니다. 은은하지만 매화가 가진 생명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자유로운 선에 담겨 있는 기운찬 능력을 통해 섬세하고 장식적인 필선의 조화와 함께 특유의 감성적 표현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그 중 가지 부분을 자세히 보면 화면 가득 채운 가지는 매화꽃 여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킨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꽃은 자연적 생명력과 아름다운 예술 소재로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습니다. 이 작품은 행화(杏花), 장미, 목련, 모란, 추규(秋葵) 연꽃, 부용, 국화, 수선, 매화에 이르기까지 봄부터 겨울까지의 꽃을 계절 순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채색선염(採色渲染)으로 물기가 있는 곳에 먹을 써서 번지게 하는 기법을 활용하였으며,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먹을 찍어서 한 곳에 그리는 방법을 사용해 대상을 표현함으로 선과 면 사용의 기술을 동시에 보여줬습니다. 별도의 표기가 없어 제작 연대를 확인하긴 힘들지만, 이도영이 계절감을 나타내는 화훼 등 자연물을 다루는 것을 1920년대 작업한 것으로 미뤄봤을 때 이 시기 이후 제작된 것으로 짐작합니다.

일본 메이지 화단에서 유행이었던 꽃 피는 식물을 소재로 한 그림 화훼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 작품 또한 가로로 긴 형태입니다. 긴 화면(53.5×256.5cm)에 두루마기가 사계절의 화훼를 한 화면에 담아 관람객의 눈을 편하게 해주는 것을 물론 한 폭의 그림에서 사계절의 꽃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장점을 만든 그림입니다. 화폭 상단 가운데 <사이청향(四李淸香)>이라고 적힌 이 작품은 사계화훼도 중 한 점밖에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화단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