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8호


 

봄소식을 전하는 첫 번째 선물 ‘꽃’은 봄바람이 불어올 때쯤 제일 먼저 ‘나는 봄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 꽃들이 서로 ‘내가 먼저에요’하는 듯 다투어 피어나는 모습은 마치 자연이 빚어내는 무지개인 것처럼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겨우내 간직한 기운을 뽐내는 생명력의 봄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자연이 허락해준 선물에 감동하게 된다. 또한,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낸 꽃을 통해 강인함과 눈에 보이지 않은 방해물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는 생존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우리 선조는 꽃을 통해 어떠한 삶의 지혜를 모았는지 알아보고 그 지혜를 마음에 고스란히 담아보자.

꽃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우리 선조는 아름다운 사물이나 사람을 가리켜 꽃 ‘화(花)’자를 붙여 표현했다.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 ‘화안(花顔)’,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화의(花衣)’, 아름다운 족두리를 ‘화관(花冠)’, 혼례 때 신부가 타는 것을 ‘꽃가마(花轎)’라고 하였다.
또한, 꽃은 아름다운 색과 그윽한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의 정취를 더 깊게 해주었다. 독립운동가인 매천 황현(黃玹)은 “꽃은 천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시인 노자영(盧子泳)은 자신의 정원에 핀 꽃을 보며 “수많은 명현들에게서 명훈과 금언을 듣느니 나는 이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것이 더 마음이 정화되고 아름다워지는 듯하였다.”라고 했다. 이렇듯 누구나 할 것 없이 꽃에 매료되었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생활 습관을 예측하기도 했다. 농경시대에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풍흉을 예견하거나, 날씨를 예보, 시간을 짐작하기도 하고 또는,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유만공의 ≪세시풍요≫라는 시 중에 ’한가한 늙은이가 풍년징조를 알아보고자 진달래를 꺾어와서 가만히 꽃술을 세고 있네’ 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진달래의 꽃 수염이 많이 달리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매화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들고 매실이 많이 달리는 해는 논농사가 잘 된다 하였고, 봄에 흰 꽃이 많이 피는 해에는 백도를 재배하고 붉은 꽃이 피는 해에는 홍도를 재배해야 수확량이 늘어난다고 믿었다. 또한 냉이가 먼저 나면 풍년, 두루미냉이가 먼저 나면 흉년이 들 것이라고 믿었다.
꽃을 통해 날씨를 예측한 표현도 찾을 수 있다. ‘벚꽃 싹이 일찍 바래지면 여름 날씨가 좋다’라는 속담은 벚꽃이 필 무렵이 날씨가 좋으면 꽃 수명이 짧아져 색깔도 일찍 바래고, 일찍 지는데 이는 4월 기온이 높으면 8월의 기온도 높은 경향이 있어서 생긴 말이다. ’꽃샘추위에 설늙은이 얼어죽는다’ 는 속담은 봄꽃 필 무렵에는 젊지도 않고 아주 늙지도 않은 반 늙은이가 얼어 죽는다고 할 정도로 추운 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매화가 피는 방향이 밑을 향하면 비가 많이 오고 위를 향하면 늦서리가 온다고 하며 꽃을 통해 날씨를 점쳤다. 꽃을 통해 운이 좋고 나쁨을 예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나타난다. <백제본기> ‘다루왕(多婁王)조’에 ‘백제 다루왕 21년 2월에 궁중의 큰 회화나무가 저절로 말라 버렸다. 3월에 좌보(左輔, 함께 나라의 일을 보던 벼슬) 걸우가 죽음으로 왕은 이를 슬퍼하였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큰 나무가 스스로 말라 죽으면 왕의 신하가 죽을 징조를 점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모과나무는 늙은 사람이 심어야지 젊은 사람이 심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모과나무에서 열매가 맺게 되면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이 죽게 된다는 속설 때문이다.
꽃은 시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오후 4시가 되면 활짝 피는 분꽃을 보며 어머니들은 저녁 준비를 서둘러 시작했다.

 

흔히들 길에서 보는 꽃이 꿈 속에 등장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지만 선조의 지혜를 살펴보면 오래된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은 집안에 영화로운 일이 생기는 것,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면 장래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라 해석했다. 토굴 속에 살고 있을 때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를 찾아가 “꿈속에 꽃이 지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무슨 징조입니까?”라고 물으니 무학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꽃이 지니 마침내 열매가 열릴 것이요. 거울이 떨어지니 어찌 소리가 없으랴” 무학의 말을 듣고 이성계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 꿈을 꾸고서 길몽이라는 해석에 자신감을 얻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꿈 속에 나타나는 꽃을 통해 임신을 알기도 한다. 태몽에 꽃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여자아이의 경우 꿈 속에 꽃이 나왔다고 한다. 그 내용을 증명하는 듯 무조신화(巫祖神話)인 <바리공주> 에서는 길대부인 태몽에 첫째 공주 청도화, 둘째 공주 홍도화가 나타났다고 한다. 태몽에 나타나는 꽃에는 몇 가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데 첫 번째는 회임(懷妊)을 뜻하고 두 번째는 주로 여아의 출생을 암시한다.

‘꽃’을 활용한 지혜에는 화식(花食)문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인이 남긴 문헌에 이와 관련한 여러 기록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영양적인 측면보다 꽃이 가진 아름다움과 계절의 특징을 의미하며 먹었다는 것이다. 둘째, 꽃을 통해 자연을 미각 속으로 가져온다고 하는 점이다. 우리 선조들은 꽃을 눈으로 즐기면서 시각적 아름다움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입으로 먹으면서 자연을 미각으로 느끼기도 했었다. 조선 시대 문신인 백호 임제(林悌, 1549년~1587) 의 시를 보면 ‘쌍 젓가락으로 집어 다 먹으니 향기는 입안 가득하고 한해의 봄빛이 뱃속까지 비춰드는 구나’라고 하며 자연의 풍경을 배부른 포만감으로까지 전하고 있다. 셋째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을 기원하며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꽃을 먹기도 했다. 꽃을 이용한 음식으로 가향주(加香酒), 두견주(杜鵑酒), 도화주(桃花酒), 백화주(百花酒), 국화주, 연화주 등 주류가 있고 진달래화전, 장미화전, 국화화전 등 찹쌀가루를 반죽해 기름에 지진 화전이 대표적이다. 생채나 김치로도 만들어 먹고 국, 한과, 차와 음료로도 이용하는 등 생활과 꽃은 예전부터 함께 어울려서 이루어진 내용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의례에서 꽃은 꽃만이 가진 상징성을 바탕으로 여러 곳에 사용되었다. 전통혼례 시 혼례상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백자병에 꽂아 두는데 이는 변함없는 절개를 상징하고 더불어 소나무는 잡신을 물리치고 장수를 빌며 대나무는 자손 번창을 의미한다.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영암지방 무당노래 <베리데기>에서는 ‘동백나무 그늘 밑에 청실홍실 맺은 부부 / 백년가약을 맺는구나’라고 읊고 있는 것을 보아 남쪽 해안지방은 동백꽃을 실생활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내용으로는 ‘신랑 방을 꾸미자 신부 방을 꾸미자 / 파랑 꽃은 신랑 맡에 빨간 꽃은 신부 맡에 ……’라는 홍천지방에서 불린 노래로 신방에도 꽃장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축하연에도 꽃은 빠지지 않았다.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국화는 회갑 ‧ 진갑 등 헌화로 사용했으며, 장례에서는 주로 연꽃을 사용했다. 연꽃이 영혼의 부활을 상징하고 일반적으로 재생의 주술적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국가의례에서도 꽃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의식은 삼국 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국가 체제가 갖춰지면서 의례에 대한 관심과 문화가 자리 잡았고 꽃의 활용도 역시 점차 확대되었다. 고려 시대 이후 궁중에서 의례 때 꽃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고려 시대 궁중에서는 꽃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궁중의식인 가례(嘉禮), 백관을 위한 연회, 연로한 대신에게 베푸는 연회 등에서 꽃을 사용하는 것은 관례가 되었을 정도이다. 육십 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에게 연회를 베푸는 기로연(耆老宴)에서는 각종 예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그 예물에는 꽃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왕의 즉위, 성혼, 책봉 등의 예식인 가례(嘉禮) 외에도 외국 사신과 중신에게 베푸는 연회가 이뤄졌는데 이런 의식에 행사를 화려하게 하고 축하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꽃을 많이 사용했다. 꽃의 용도를 살펴보면 첫째 의식이 진행되는 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함이고 둘째 의식을 진행하는 순서로 꽃을 바치거나 뿌리는 경우이다. 셋째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몸에 꽃을 장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꽃은 우리 선조의 삶에 있어 또 다른 언어가 되기도 하였다. 선조는 꽃을 대하며 ‘신의 창조물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꽃이다’라고 하는 등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꽃 자체가 가진 자연적인 아름다움보다 꽃이 지닌 또 다른 가치를 더 존중하며 꽃의 품격을 높였다. 꽃의 내면에 대한 성찰로 덕(德) ∙ 지(志) ∙ 기(氣) 정신을 면면히 쌓아오며 풍요로운 마음과 아름다운 정신을 지켜오며, 꽃 문화의 전통과 정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선조가 남긴 꽃의 지혜를 생각해보며 국립중앙박물관의 꽃길을 한번 거닐어 보면 어떨까? 분명히 이전에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