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6호


지금 박물관에서는 II

국립중앙박물관은 역대 중국 서예가들의 글씨를 담은 법첩을 엄선하여 테마전 “서예의 길잡이, 중국 법첩法帖”을 마련하였습니다. 법첩은 모범이 되는 글씨의 모사본이나 탑본搨本 등을 옮겨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책 모양으로 장정裝幀한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법첩은 중국 역대 명필을 담은 것이며, 우리 조상이 서예를 공부하는 데 있어 늘 가까이 한 것들입니다. 법첩은 현재에도 서예 학습 교재로 사용되며 감상의 대상으로서 수장收藏과 보존의 가치를 지닙니다. 선대의 명필은 법첩을 통 하여 후대로 전승되며, 원본이 없어지게 되더라도 법첩으로 옛 글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친필을 대하듯 우리 선조가 아끼고 사랑하며 연마했던 중국 법첩을 통해 서예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서예書藝는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작품으로 쓴 글씨뿐만 아니라 편지 글과 같은 글씨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여기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명필의 글씨를 사랑하며 늘 가까이 두고 감상하기를 원했습니다. 옛 명필과의 만남은 아름다운 글씨를 동경하며 좋은 글씨를 쓰고자 노력한 수많은 이들의 소망일 뿐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사제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배움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법첩은 옛 명필 글씨를 보다 잘 보존하고 이를 편리하게 감상하고 수장하며 서예를 공부하기 위한 중요한 학습서의 필요성이 탄생시킨 산물입니다. 법첩을 통해 역대 서예가의 글씨 자체뿐 아니라, 서체, 그리고 나아가서는 서예가들 간의 영향 관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매우 실제적이며 유용하고 귀중한 가치를 지닌 법첩은 서예 공부의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며 서예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법첩이 탄생하기 이전 중국에서는 이미 서체의 형성이 이루어졌고, 지필묵연紙筆墨硯 등을 사용함으로써 글씨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무렵부터는 글씨의 미적 가치를 알았고 이를 즐길 수 있는 기반이 이루어졌습니다.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303~361년)·왕헌지王献之(344~388년) 부자의 등장과 그들의 예술성 충만한 글씨는 문자를 예술로 끌어내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많은 서예가들이 왕희지의 글씨를 법으로 삼아 아름다운 글씨 표현을 꿈꾸었습니다. 이설이 많지만, 본격적으로 제작한 법첩의 시초로 오대십국五代十國(907~960년) 시기의 남당南唐(937~975년)에서 만든《승원첩昇元帖》을 꼽습니다. 북송北宋(960~1126년) 때는 특히 역대 명필들의 필적 수집과 감상, 감정이 성행하였으며, 서예와 글씨 및 금석학 연구 또한 활발했던 시대였습니다. 황제는 서예의 수집과 감상을 즐겨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태종太宗 순화淳化 3년(992) 드디어 조정 내에 비장秘藏한 역대 필적을 분류 정리하여 《순화각첩淳化閣帖》을 편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화각첩》에는 왕희지와 왕헌지를 중심으로 역대 황제와 명신名臣을 포함한 명필의 글씨를 수록하였습니다. 《순화각첩》의 발간은 향후 법첩 제작의 기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대에는《정운관첩停雲館帖》,《희홍당첩戱鴻堂帖》등이, 청대에는 건륭제가 주도하여《삼희당첩三希堂帖》,《쾌설당첩快雪堂帖》,《경훈당법첩經訓堂法帖》,《여청재첩餘淸齋帖》 등이 발간되었는데, 이는 모두 《순화각첩》의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북송 후반부터는 개인 수장가도 법첩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명대에서 청대까지는 상업적인 법첩의 출판도 이루어지는 등 법첩의 제작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또한 법첩 자체가 하나의 연구 영역으로 발전하였으며 청대에 이르면 법첩 애호의 분위기는 첩학帖學의 발전과 함께 하며 융성하였습니다.
한편 청의 청의 완원阮元(1764~1849년)은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에서 북위北魏(386~535년)의 비문 등 북비北碑에 담긴 글씨가 법첩으로 발간된 왕희지의 글씨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북비의 중요성과 함께 한편 법첩과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제작되어 온 비첩碑帖은 비학碑學의 융성과 함께 다시금 관심을 받으며 연구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첩에 담긴 글씨는 모사와 모각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글씨의 원래 모습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비판을 받으며 법첩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아졌습니다. 법첩은 반복적인 복제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원본이 가졌던 주요 특징들은 이미 없어져 버려 글씨의 형태, 정확히는 글씨의 그림자만 볼 수 있는 형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근대적 인쇄술의 도입은 전통적인 법첩의 발간이 자연스럽게 제작을 멈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법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를 적합하게 모사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법첩은 제작 초기에는 모사 자체에만 주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섬세한 표현 기술이 수반되어야 하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점차 효율적인 제작이 요구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사한 글씨를 새기고 이를 탑본하는 방식으로 법첩 제작 방식은 체계화 되었습니다.
각 모사 방식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모서(摹書·模書)진적 위에 종이를 깔고 그 위에 글씨의 형태를 직접 덧쓴 것으로 모사의 가장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글씨의 형태만을 위주로 그대로 본뜨기 때문에 글씨 형을 보는 데에는 가장 적절한 방식입니다.
- 임모(臨摹·臨模) 진적을 옆에 놓고 임서하여 모사하는 것으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서예가들이 글자의 형태와 더불어 구성과 짜임새, 힘의 변화 등을 고려하며 모사하는 방식입니다. 임서를 기반으로 임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과거 명필의 실력에 필적하는 수준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 탑모(搨摹·搨模) 진적 위에 종이를 덮는 점은 앞서 소개한 모서와 비슷하지만, 모서가 글씨를 직접 그대로 덧그려 써서 베끼는 것에 비해 탑모는 선으로 윤곽만 베낀 뒤에 그 안쪽을 먹으로 메우는 방식입니다. 설명만으로는 매우 단순한 모사 기술로 보이나, 어느 정도의 요령을 숙지하고 경험을 쌓으면 진적에 근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진적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표현도 가능합니다.
- 모각(摹刻·模刻) 모사한 글씨를 돌이나 나무판에 옮겨 베낀 후 새겨서 탑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북송 때부터 활성화되어 계속 사용되었고, 법첩 제작이 쇠퇴하기 전까지 이방식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법첩은 글씨를 좀 더 편하게 감상하고, 보관하기 좋도록 외형을 만듭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방식의 작업을 배첩(褙貼), 장황(裝潢) 또는 표구(表具)라고 합니다. 법첩의 형태는 대부분 책으로 꾸며 한 면씩 넘겨 볼 수 있도록 구성합니다. 또한 사경(寫經) 처럼 아코디언 식으로 접고 펴는 방식(절첩본折帖本)도 있습니다. 한편 법첩을 잘 살펴보면 법첩 면이 탑본한 그대로를 붙여놓은 것도 있고, 글씨 행에 맞춰 잘라 붙여놓은 것도 있습니다. 법첩의 편집은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선《순화각첩》처럼 가장 일반적인 법첩의 예를 보면, 처음부터 법첩 제작을 위해 글씨를 모사하여 이를 새겼기 때문에 탑본한 그대로 붙여서 법첩을 완성합니다. 이렇게 구성한 첩은 전투본(全套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법첩이 《순화각첩》처럼 처음부터 법첩 제작을 위해 구성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탑본을 첩으로 편집하기 위해 별도로 알맞게 잘라서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첩 면의 크기를 잘 계산하여 탑본을 몇 면으로 만들지를 결정한 후 탑본의 글씨 본문 각 행을 잘 오려 끊어낸 후 글줄을 책자로 만들기 편리하도록 오려 붙입니다. 이렇게 글씨를 행에 맞춰 편집하여(전장剪裝) 만든 첩을 전장본(剪裝本)이라고 합니다. 이 방식은 법첩뿐 아니라 글씨를 서첩으로 직접 제작할 때도 쓰이며, 특히 병풍, 두루마리 등을 서첩으로 다시 만들 때도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