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어느 특정한 날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변화를 느끼는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입춘(立春), 하지(夏至), 추석(秋夕)등 계절이 바뀌는 것을 공통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어느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농경을 중심으로 한 해 동안의 명절과 24절기가 포함된 세시풍속은 다른 명칭으로 농경의례라고도 합니다. 이 각각의 세시풍속에는 특성에 맞는 의례와 놀이를 즐겨했는데 더 이상 농업이 국가의 중심이 아닌 현대에는 그 풍농을 예측하거나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화된 전통의례의 체험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세시풍속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월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어 현재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행사나 놀이에 관련한 내용들도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시기별로 정리되는 세시풍속은 주로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데, 전통적으로 겨울철 세시풍속은 음력 10월부터 12월까지를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엄밀히는 설과 정월대보름은 봄철 세시풍속에 속하게 됩니다. 이번호 뮤진의 E특별전에서는 신년을 맞이하는 시기까지를 겨울철로 생각하고 세시풍속 및 겨울풍속에 관련한 유물들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음력 11월은 동짓달이라고 부릅니다. ‘동지’라고 부르는 특정한 날이 있음에도 해당되는 월에 같은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날이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현대에도 동짓날에 그 날의 풍속에 맞는 것을 특별히 하지 않더라도 팥죽을 챙겨먹습니다. 팥은 붉은 빛을 띠는 곡물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동지에 팥죽을 쑤어서 집안 곳곳에 두고 식혔다 먹었습니다. 동지에 팥죽을 먹으면 다음 한 해 동안 불운 없이 밝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만 보더라도, 예로부터 동지를 한 해의 마지막으로만 보지 않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로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지에는 단오에 부채를 선물로 나누어주듯이 달력을 선물로 나누어주었고, 작은 설로 여기며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했습니다.
민간에서 동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정의 신하들이 왕에게 축하인사를 하는 동지하례(冬至賀禮) 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충청도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이자 보령도호부사(保寧都護府使)였던 오정선(吳正善)이 대비(大妃)에게 올린 전문(箋文)인 〈동지령절전문(冬至令節箋文)〉은 동지하례의 기록이 되는 유물입니다. 좀벌레에 손상된 부분이 많고, 중국 육조시대에서 당나라까지 유행했던 화려하고 교묘한 문체인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를 써서 해석이 어려운 이 문서는 동지를 맞이하여 하례를 올리기 위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동지하례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도 서술하고 있는 중요한 행사였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동지를 중시했던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동지란, 궁중과 민간을 가릴 것 없이 중히 여겼던 세시풍속 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동지가 있는 근처의 날들엔 오후 5시면 사방이 어둑해지고, 요즘같이 전기로 밤을 밝힐 수 없었던 시절의 긴 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가 있었습니다.
마을 큰 사랑방으로 모여든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멍석을 엮기도 했고, 초를 켠 방에 모인 가족들은 이야기책을 읽거나 윷놀이, 승경도놀이를 했습니다.
그 중 승경도(陞卿圖)놀이는 다른 명칭으로 종경도(從卿圖)놀이라고도 했는데, 종이에 모든 관직명을 적고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에 따라 승진, 파직, 사약을 받기도하는 등의 과정이 나오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는 앞으로 계속 공부를 해나갈 남자아이들이 나 양반집 아녀자들이 벼슬의 이름과 그 높낮이를 익힐 수 있게 하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가로 80cm, 세로 120cm가량의 넓은 종이에 80개 ~ 300여개의 칸을 나누어 유학(幼學)에서 봉조하(奉朝賀)까지 관직명을 씁니다. 안쪽에는 중앙관, 바깥쪽에는 지방관이나 하급무관직을 쓰고 빈 칸에는 놀이규칙을 써넣기도 합니다.
1에서 5까지의 눈금을 새긴 윤목(輪木)은 막대형과 주사위형이 있었는데 이것을 굴려 나온 수에 따라 말을 움직이는 놀이로, 기본적인 방식은 윷놀이와도 비슷합니다.
4나 5가 연속해서 나오면 빠르게 승진을 하며, 1이나 2가 계속되면 파직이나 사약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이 놀이는 크게 유행해서 『성종실록(成宗實錄)』묵재일기(黙齋日記)』『난중일기(亂中日記)』등에서 승경도를 제작했다거나 놀이를 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 한편, 이 놀이의 유행을 비판하는 내용이 다른 책에 쓰여 있을 정도였습니다.
점차 직제가 개편되고 과거제도가 사라지면서 이 놀이는 사라져갔으나 조선총독부가 1930년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225개의 조사지역 중 132개의 지역에서 승경도놀이를 했다고 하니, 긴 겨울밤사이 나라의 최고벼슬에 올라보는 경험이 큰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매서운 눈빛을 가진 산을 호령하는 호랑이는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서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 서로 간섭할 수 없다.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이 있어 산에는 산을 호령하는 원칙이 있어 존중해야 하며 그 역할을 하고 있는 호랑이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신도에서도 호랑이를 자주 볼 수 있고, 벽사(辟邪) 즉,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에 대해서도 《담문록(談聞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등에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초기부터는 새해에 문에 붙이거나 선물로 주고받은 설그림(歲畵)에도 호랑이가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새해 대궐문 양쪽에 귀신을 물리치는 도교 장군그림을 붙이던 것이 민간으로 전해지며 다양한 내용으로 변화되었고 그 중 호랑이도 하나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현재(玄齋)라는 도장이 있어 심사정(沈師正,1707~1769년)의 작품으로 전해져 왔으나,
글씨체가 많이 달라 그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까치와 함께 그린 호작도(虎鵲圖), 대나무를 배경으로 그린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와 달리 이 그림은 아무 배경이 없이 호랑이만 그렸습니다.
시선은 바라보는 쪽에서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고 꼬리는 반대편 상부로 치솟아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심스레 내딛은 발걸음과 둥글게 말아 올린 허리가 주는 긴장감은 화면을 꽉 채운 호랑이의 무늬와 함께 보는 사람을 다소 압도하는 기운을 전달합니다.
사악한 기운을 가진 것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맹호도의 모습에서 든든함이 느껴집니다.
한겨울 나뭇가지, 바위 등 사방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습니다. 이 그림은 필법에 뛰어났고, 그림과 음률에까지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던 성세창(成世昌)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만큼 화면의 상단에서 중간까지의 산수표현은 겨울산과 나무의 표현이 뛰어납니다.
화면 중앙에는 말을 탄 인물과 수행하는 듯한 인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말을 탄 인물은 휘항을 쓰고 엉덩이 아래에 따뜻해 보이는 천을 두 겹 깔았습니다. 하단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면 화면 상단의 분위기와 사뭇 달라집니다. 그야말로 풍속화다운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겨울 산길을 지나다 만나는 술 한 잔을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니를 여는 사람, 어설피 지은 간이 공간에 앉아 독에서 아마도 술을 한 잔 꺼내 따르며 그 모양을 유심히 보는 주모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등산을 가서 따뜻한 음료 한 잔을 만나거나 산중 별장에서 뜨끈한 국물 한 사발을 만났을 때의 반가운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그 외에도 화면 속 겨울이 상당히 추운 때라는 것은 산수표현 뿐 아니라 상단의 두 남성이 방한용 모자인 휘항(揮項)을 쓴 모습, 그 아래 불을 쬐는 소년과 남성 그리고 곁에 세워둔 지게의 땔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절기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고 한 해 한 해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어느덧 새해를 맞이하면 곧 봄이 되고, 녹음을 즐기다보면 여름이 다가옵니다. 더위에 지칠때면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여러 색깔의 단풍을 즐기다보면 눈이 내립니다. 그러는 사이 명절과 각 절기를 지나면서 계절의 변화를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활동이 적어지고 새로운 한 해를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겨울철의 세시풍속은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들이 다가오기를 축원하며 지내게 되는 계절입니다. 이번 E특별전은 겨울을 나는 동안의 절기 및 계절에 관련된 풍속을 담은 유물과 함께했습니다. 음력11월인 동짓달이 곧 끝나고 음력12월이 됩니다. 세시풍속을 떠올리며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