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전통과 현대의 만남

만남에 앞서

첫만남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문은배 색채디자인연구소>로 들어서면서 의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자이너의 정돈된 혹은 마감이 잘 된 느낌의 실내를 기대한 선입견에 타격을 주는 모습이었다. 작은 소품들과 개별 통에 담긴 가루들이 한쪽에 쌓여있고 입구를 따라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있었는데, 그야말로 학자의 연구실 같았다. 숱하게 그 앞에서 책을 빼들어 읽고 다시 꽂으며 관련된 소품을 모아 그 곁에 두고 이리저리 조금씩 옮겨가며 보았을 것이 분명한 느낌이었다. 편안한 모습으로 유쾌하게 인터뷰에 임하시던 문은배 선생님은 색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설명하다가 이내 벌떡 일어나 개인사무공간으로 들어가서는 1990년대의 자료들을 가지고 나와 전통색 연구에 바친 오랜 노력과 열정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당시 한국색채연구소의 한국 전통색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한 선배들의 권유로 전통색채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인터넷환경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의 열악한 상황에서 모두 복사나 수기로 남 아있었던 선임 연구자들의 방대한 자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정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료들의 내용 과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들에 생기를 부여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열정이 오늘날 전통색채 체계를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 제작한 얇은 두께의 전통색채에 관한 자료는 자비로 1,000부를 찍어 주변사람들에게 배포하며 전통색에 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 그에서 비롯되어 점차 전통색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된 선생님은 촬영이 가능하면 다행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장갑을 끼고 정해진 테이블, 정해진 장소에서 밖에 볼 수 없었던 25권이상의 고서적을 열람하고 색의 이름들을 찾아내어 중요도나 반복 정도를 기준으로 정리했고, 그렇게 해서 139개의 전통색명을 추릴 수 있었다. 물론 이보다 더 많은 자료를 본다면 더 많은 정보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열정이 눈빛에서 반짝였다. 선생님은 전통색이라는 한자조차 직접 쓸 일이 없이 지내다가 고서적을 보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하였다. 중국 청화대학의 고문학 연구자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경우 비용절감과 시간단축을 위하여 직접 한문해석 수업을 듣고 익혔으며, 족히 두께 10cm는 넘을 영인본 고서들을 구입해서 단 몇 쪽의 자료를 얻기 위하여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그 사이 선생님은 고서적에서 오방정색(五方正色)뿐 아니라 오방간색(五方間色)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오방정색에서 흑색의 위치를 올바르게 수정할 수 있었고 또한 유황(騮黃)이 유황(硫黃)으로 둔갑하여 쓰이고 있다는 것 등 전통색에 관한 연구 중 발견한 사실들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은 세심하게 자료로 축적되어 갔다. 더욱 정확하게 그 빛깔을 담아내기 위하여 더 좋은 장비를 사용하고 그도 성에 차지 않아 문화재나 유물을 제 색대로 표현하기 위하여 측색(測色)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가능한 한 전통과 자연의 요소를 통해 색을 설명하고자하는 노력은 한겨울 추풍령에서 쌓인 눈을 찍게 했고, 직접 천을 염색하게 했으며, 전통방식으로 색색의 떡을 만들게 했다. 선생님은 발견을 하면 나누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개발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망설이지 않고 자료를 만들어나갔다.

발견한 지식을 실효가 있도록 하는 선생님의 근본적인 방향성 은 환경디자인에의 색채적용으로 이어진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한 쪽 벽에 쌓여있던 통에 든 것은 가루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채취한 흙이었다. 그 장소에서 난 흙의 색을 활용하여 지역을 친환경적으로 디자인 한다는 것이 문은배 선생님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환경 디자인에 가지고 있는 개념적인 차원의 원칙이라 생각했으나, 자료를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붉은 흙,회색흙, 녹색 빛이 나는 흙 등 다양한 지역의 흙은 주변의 환경과 어우러져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그 지역 환경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색에서 안정과 쉼을 얻는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가 실천 되는 빈도가 생각보다 낮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버스정류장, 지하철, 건축 공사장 주변 펜스 등이 보기에 편안한 색상으로 바뀌고 기능적으로도 보강되고 있는 요즘이다.

선생님은 색은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 논하기 어렵다며, 한국의 전통적 색채 사용방식은 균형미의 추구에서 가장 명확한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정색(正色)과 간색(間色),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개념을 분명히 알고 색을 사용한 선조들의 사례를 색동저고리와 직접 염색하여 제작한 조각보 등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유사색으로 어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분명하면서 제 목소리를 내는가하면 서로의 색을 더욱 강조해주는 등 단 하나의 색이 아니라 여러 색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용법, 그것이 한국에서 색채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문은배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우리 문화재는 경복궁으로 학생들과 무려 6시간 반을 소요하며 둘러보시는 것이 하나의 코스가 되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종류의 단청을 볼 수 있고, 특히 우리나라 벽돌로만 만든 친자연적인 자경전(보물 제809호)의 담장과 굴뚝 등을 보며 건축물의 색채 사용에 대해 할 이야기 거리가 많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여러차례 경복궁을 방문했으면서도 그곳의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전통색채의 사용 때문이라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우리의 색이기 때문에 전통색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방식으로 곁에 두어야 할 재산임을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