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유물박사 교실

뮤진 유물박사 교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곳은 뮤진 사이버 박물관에서 만나보았던 <E-특별전>과 <뮤진 확대경>을 또 다른 시각으로 만나보는 공간입니다. 우리 문화가 지닌 다채로운 매력 속으로 지금 들어가 볼까요?

물가풍경 무늬 정병, 문무왕 그리고 호우총 발굴이야기

세상의 빛을 본 두르마리

이번 뮤진확대경에서 소개한 물가풍경 무늬 정병의 빛깔이 기억나시나요? 마치 원시림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바탕이 물가의 풍경을 묘사한 문양 소재와 잘 어울리며 신비로운 느낌을 만들었습니다. 짙은 흑색 선으로 묘사한 문양은 다루기 쉬운 필기구로 그림을 그린 것처럼 보였고요. 이 절묘한 색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우리가 관찰했던 유물의 표면 색상과 질감은 사실 바탕 재료에서 비롯된 효과입니다. 제작자가 결과물을 예측하고 계산해 낸 효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효과라는 의미지요. 짙은 이끼가 낀 것 같은 바탕색은 구리를 주재료로 하는 청동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부식된 색입니다. 짙은 회색처럼 보이는 구불거리는 선은 가느다란 은실이 역시 산소와 결합하여 짙은 색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아마 본래는 짙은 청동바탕에 하얗게 반짝이는 은으로 문양을 묘사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바탕은 초록으로 점점 밝아지고, 문양은 짙은 흑색으로 진해지면서, 바탕과 문양의 대비가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밝은 바탕에 짙은 문양이 그려지게 된 것이지요. 청동 바탕을 장식한 은은 따로 접착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얇게 홈을 내고 그 사이에 은실을 끼워 넣는 방법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청동과 은이라는, 흔치 않은 재료가 장인의 손을 만나 하나의 몸체로 결합되던 것이지요.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공기와 시간이라는 옷을 걸쳐 입으며 장인의 솜씨를 위에 우아한 품격을 더해갑니다.

맑은 물을 담는 정병

물가풍경 무늬 정병에서 보았던 ‘정병’이란 무엇일까요? 정병(淨甁)은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을 일컫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쿤디카(kundika)라고 불리는 정병은 불교의 유행과 함께 동아시아로 확산된 불교 용구 중의 하나입니다. 한자로 군지(軍持) 라고도 불리는 정병은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법화경》에서 발우(鉢盂), 향로(香爐) 등과 함께 불법을 공부하는 승려가 반드시 지녀야 할 18물 중 하나에 포함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불교용구였습니다.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을 담는 정병에는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감로수(甘露水)를 담는다고도 이해되었습니다. 이에 정병은 부처님 앞에 물 공양을 위한 공양구로서의 역할과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이 지니는 지물로서의 역할을 함께 하게 됩니다. 가늘고 긴 목에 어깨 부분에 뚜껑이 있는 주둥이를 지닌 독특한 형태의 정병은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제작되었지만, 8세기 중엽 만들어진 석굴암에는 연화가지를 꽂은 정병을 왼 손에 쥐고 있는 관음보살 조각이 포함되어 이른 시기 정병의 모습을 관찰 할 수 있습니다.

문무왕과 감은사

화려한 사리갖춤이 출토된 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의 꿈이 함께 배여 있는 사찰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위치하여 동해 바다와 인접해 있는 감은사(感恩寺)와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흥미로운 구절이 남아있습니다. 기록에는 “문무왕(文武王)께서 왜병(倭兵)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시어 해룡(海龍)이 되셨고, 그 아드님이신 신문왕(神文王)께서 즉위하시어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마쳤다”라는 창건기록과 함께 또한 “금당(金堂) 섬돌 아래에는 동향(東向)으로 구멍 하나를 열었으니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서릴 수 있는 설비라고 한다”라는 구절이 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감은사 절터의 발굴조사에서는 금당아래에서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유구(石造遺構)가 발견되었습니다. 높이 약 60cm정도의 지하 공간은 동해와 인접하여 동해의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습니다.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문무왕에 대해서는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는 구절이 함께 전하고 있어 감은사 앞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문무왕이 동해 바다의 용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기록과, 감은사의 조사가 일치하게 되면서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왕의 의지만큼은 의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손으로 지켜나가는 우리 문화재, 호우총

감은사 터 발굴이 국립박물관 최초의 사지발굴이었다면, 국립박물관 최초의 발굴은 무엇이었을까? 1945년 해방 이후 박물관은 우리 문화를 우리 손으로 가꾸고 지켜나간다는 사명을 안고 발굴조사와 연구, 전시 등을 주요 기능으로 삼고 활동을 전개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광복 이후 한국인이 주도한 첫 발굴조사로 1946년 5월 경주 호우총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꼼꼼한 발굴 기록과 현장 경험으로 이후 각종 발굴조사의 선례가 되었던 호우총 발굴조사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의 대외관계를 규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발굴 조사했던 무덤의 이름까지 정하게 된 ‘호우’명 청동그릇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경주의 신라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호우’명 청동그릇 바닥에서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문구가 돋을 새김되어 있었습니다.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로 새겨진 이 문구를 통해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 해인 415년, 고구려에서 만들어졌던 이 그릇을 신라 사신이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의 발견은 신라고분의 편년연구 및 신라와 고구려의 대외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우리 문화재를 우리 손으로 지켜나간다는 사명감은 첫 발굴조사에서부터 의미 있는 수확을 거두게 해 주었고, 이 후로 이어진 수많은 조사와 연구 성과를 위한 굳건한 바탕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글-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 MUZINE 편집실 / 사진제공 및 일러스트-아메바디자인, 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류홍보과 MUZINE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