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47호


한창의 여름입니다. 올해의 달력도 반이 넘어갔습니다. 지난 반년, 지난 시간 열심히 달려오셨는지요? 나날이 치솟는 바깥 온도처럼 의욕적으로 도전한 새해 결심도, 치열한 일상도 정점을 향해 치닫는 것 같습니다. 또 한해의 절정을 맞는 즈음. 일에 대한 몰두를 잠깐 멈추고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뜨거운 열정과 의지를 담아낼 그릇이 넉넉해 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번 뮤진에서는 옛 사람들의 일상 중 잠깐의 휴식이 주는 달콤함을 찾아보았습니다. 나를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충실할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을 찾아 지금 전시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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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낯의 여유

    바람이 살랑 불어와 잔잔한 수면에 파동을 일으키고, 길게 늘어진 덩굴 몇 가닥이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푸른 이끼가 끼어 있을 것 같은 널찍한 바위 위에 가만히 몸을 뉘어봅니다. 단단한 바위의 곡선을 따라 팔짱을 끼고 얼굴을 묻어버리니 바위와 한 몸이 된 것처럼 편안합니다.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를 바라보면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얼굴에 번집니다. 고요함 속에 여유로움이 번져나는 순간입니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입니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시서화 삼절 詩書畵 三絶’로 불렸던 강희안 (姜希顔, 1417-1464)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과 <훈민정음>, <용비어천가>의 편찬에 관여하고 원예전문서 <양화소록 養花小錄>을 집필하며 바쁜 하루를 살았던 사대부화가는 치열했던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마음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습니다. 찬찬히 화폭을 바라다보니 그림 속 선비의 마음을 따라,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따라 편안한 휴식의 기운이 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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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보니 차 한 잔이 생각납니다. 깨끗한 물을 담아 천천히 끓이며 파릇파릇한 찻잎을 준비합니다. 적당히 식힌 물을 찻잎에 부어보니 웅크리고 있던 이파리들이 부드럽게 펴지며 하늘거립니다. 우러나온 맑은 찻물을 깨끗한 청자 잔에 따라봅니다. 맑고 푸른 청자 잔에 또 푸른 찻물이 더해지니, 높은 하늘과 깊은 물이 잔속에 일렁입니다.

    잔을 쥐고 있는 손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니 입술에 닿은 찻잔의 감촉이 매끄럽습니다. 한결 진해진 차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머금어봅니다. 따뜻하고 맑은 기운이 목을 타고 온몸에 번지며 마음을 편안하게 적셔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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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관을 정제하고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며 바른 자세로 책을 읽습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등을 당당하게 만든 자세는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잠시 책을 덮고 쉬는 시간을 가집니다. 한껏 힘을 주고 있던 몸에서 슬며시 힘을 빼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팔에 무게 중심을 분산시킵니다. 이때 단단한 팔걸이로 팔을 받쳐줍니다.

    유난히 붉은 빛을 지닌 소나무를 골라 팔걸이를 만들었습니다. 상판 가운데 부분을 오목하게 만들어 손목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사슴과 소나무를 조각한 옆판에는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4개의 작은 기둥으로 나누어 연결한 중앙 기둥은 팔에서 전해지는 삶의 무게를 보기 좋게 분산시킵니다. 팔걸이 사이를 통과한 바람이 방 안 가득 편안함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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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에 한 폭의 그림을 담았습니다. 둥근 선과 직선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방사형의 화면에 균일한 간격으로 붙어있는 부채 살들은 일정한 리듬감을 부여합니다. 부채를 접었다 피는 속도에 따라 부채 속에 숨겨진 그림이 펼쳐지기도 숨겨지기도 합니다.

    북악산 줄기에서 흘러나온 물 자락이 앞으로 휘몰아칩니다. 풍광 좋은 바위 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정자는 각기 다른 사방의 풍경을 제공합니다. 풍부한 수량이 맑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이곳은 세검정(洗劍亭)입니다. 경복궁과 가까이 위치하여 임금은 물론 권문세가와 양반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유명하지요.

    사실적인 경치 묘사가 돋보이는 이 부채 그림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鄭歚,1676-1759)의 작품입니다. 부채를 펼 때마다 북악산의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올 것 같습니다. 친한 벗들과 함께했던 정자에서의 휴식이 바람을 따라 전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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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중간고사를 치룬 나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시험이 끝나고 난 후에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중간고사가 끝나던 날 나는 같이 놀자는 친구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집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문화재 도감이라는 책이었는데, 거기에 적힌 청자 양각 모란무늬 연당초무늬 막새에 대해 읽고, 이 유물을 실제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상징물로 고려 의종 때 대궐 별궁에 지었던 '양이정'을 재현했다는 ‘청자정’을 건립하였다는 기사가 문뜩 떠올라서 바로 지하철을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음료수 한 병을 들고 간 나에게 펼쳐졌던 광경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고려시대 양식의 단청으로, 연꽃과 석류와 번엽곱팽이 등으로 단순하게 구성된 머리초문양과 청색 계통의 안료를 주로 사용하여서 청아하면서도 은은한 느낌을 주는 단청과 아름다운 비색을 뽐내던 청자 기와들의 조화는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또한 해질 무렵 노을이 황금빛으로 물들인 거울 못과 수면 위를 유유자적하게 헤엄쳐 다니던 오리들이 만들어낸 거울 못의 아름답고 평화롭던 풍경...나를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충실할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을 제공해준 청자정은 박물관 최고의 휴식 공간일 뿐만 아니라 내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준 가장 소중하고 값진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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