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47호


뮤진 칼럼

풍류風流를 즐기다

풍류란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 멋이 있는 것, 음악을 아는 것, 예술에 대한 조예와 여유, 자유분방함과 즐거움 등 많은 뜻을 내포한다. 지루한 장마와 삼복더위를 보내고, 한창을 향해 치닫는 계절, 멋과 운치를 즐기던 선조들의 풍류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의 시간을 돌아본다.

풍류(風流)

성협 필 [성협풍속화첩]중 '야연' 조선 19세기

성협 필 [성협풍속화첩]중 '탐금' 조선 19세기

풍류(風流)는
바람 ‘풍(風)’자와 흐를 ‘류(流)’자가 합쳐진 단어로 보통 ‘멋스럽고 운치가 있는 일’, 혹은 그렇게 노는 일 등으로 풀이 된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 857~?)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풍류는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 예술에 대한 조예를 갖추는 것, 멋이 있는 것, 여유로운 것 등의 의미를 포함한다. 좋은 자연경관 속에서, 문학[詩], 예술[書, 畵], 음악[琴] 그리고 술[酒]을 즐긴 선조들의 풍류를 살펴보고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 멋과 운치를 따라 가보자.

성협 필 [성협풍속화첩]중 '야연' 조선 19세기

성협 필 [성협풍속화첩]중 '탐금' 조선 19세기

색을 보고 음을 듣는다.

안중식 필 도원행주도 1915년

정선 필 [풍악도첩]중 '백천교도' 1711년

물소리가
들려온다. 바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린다. 햇빛이 수면에 반짝이고, 각양각색의 나무 이파리가 초록을 더한다. 구름이 노니는 맑은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진다. 볕은 따갑고 눈이 부시지만 정자에 앉으니 바람이 살랑 다가온다. 물 흐르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사방에 퍼진다. 먼 산에서 새가 운다. 거문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느리게 타는 박자 사이 로 가야금이 끼어든다. 점점 빨라지는 합주 소리에 절로 흥이 돋으니,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안중식 필 도원행주도 1915년

정선 필 [풍악도첩]중 '백천교도' 1711년

향을 마시고 맛을 음미한다.

김두량, 김덕하 필 사계산수도 중 여름(부분) 1744년

김두량, 김덕하 필 사계산수도 중 봄(부분) 1744년

어디선가
꽃 향이 바람에 날려 온다. 간간이 풀 향이 섞인다. 흐드러진 공기가 몸속에 머물고 땅에서 건강한 흙냄새가 올라 온다. 분위기에 취해 술병을 기울이면, 시간이 녹아있는 향긋함에 코끝이 간지럽다. 깨끗하고 하얀 병에서 맑은 술을 따른다. 입술에 닿는 차가운 기운이 부드러운 향기로 변하며 목을 적신다. 깊고 풍부한 잔향이 입안에 맴돌며 달콤한 기운이 몸을 감싸면, 같은 듯 다른 물소리가 또 한잔을 부른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 편한 벗이 옆에서 또 한 잔을 권한다. 나를 보고 웃는 그에게서 그리운 사람 내음이 난다.

김두량, 김덕하 필 사계산수도 중 여름(부분) 1744년

김두량, 김덕하 필 사계산수도 중 봄(부분) 1744년

피부로 느끼고 마음을 움직인다.

이인문 필 송단피서 조선 18세기

바람에
와닿는 모시자락이 사각거린다. 미세한 움직임에 맞춰 옷자락이 바스락거린다. 한 손에 움켜쥔 잔이 매끄럽다. 손바닥에 전해진 차가운 기운을 음미하며 밖을 내다본다. 처마선 너머로 산이 일렁인다. 고운 먹을 꺼내 벼루에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진한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을 든다. 그림이 먼저인지 글씨가 먼저인지 마음이 가는대로 붓을 놀린다. 먼저 세상을 다녀간 수많은 시인 묵객과 한마음이 된 듯하다. 귓가에 들려오는 거문고 자락이 필선을 이어준다. 먹이 번지면 물이 번지고 선이 지나면 나무가 생겨난다. 화폭에 펼쳐진 나의 무릉도원에 좋은 벗이 시를 적어준다.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헤아려 주는 이가 있음이 감사하다.

이인문 필 송단피서 조선 18세기

나와 우리의 풍류

자연을
벗 삼고 예술을 즐기며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졌던 풍류는 단순히 즐기는 놀이 문화를 넘어선다. 시와 글, 술과 음악으로 채워지는 풍류는 더불어 즐기는 세계와 혼자 즐기는 세계를 넓게 공존시키며 우리의 지난 역사를 이뤄왔다. 자연과 인간, 멋과 예술, 여유와 흥이 어우러진 풍류는 수많은 시와 문장으로 문학적인 유산의 축적을 이루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음악문화를 형성했으며, 화려한 미술문화를 꽃 피웠다. 오랜만에 만난 벗과 함께 뱃놀이를 떠나는 기분으로, 홀로 초당에 앉아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시를 읊조리거나 은근한 흥취를 돋우는 기분으로, 찬찬히 박물관을 둘러보자. 그림에서, 시에서, 진열장 속 도자기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선조들의 풍류를 찾아보는 것만으로 오늘날의 풍류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글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류홍보과 MUZINE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