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46호


전통과 현대의 만남

만남에 앞서

<뮤진>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숨 쉬고 생활하는 일상에서 ‘온고지신’의 의미를 찾습니다. 이를 위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을 만나 뵙고 그 분들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국 문화의 역사와 전통이 여러분의 삶에 격조 있게 스며들 수 있도록 좋은 말씀 많이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첫만남

정영선서안조경 소장 - 풍경을 디자인하는 여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날. 이파리들의 초록이 조금씩 짙어지고, 개나리와 벚꽃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오후. 조경가 정영선 소장님을 만났다. 대표로 계신 서안조경의 사무실은 도심 한 가운데, 아기자기한 녹음이 우거지고 작은 새소리가 들리던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가지신 정영선 소장의 첫 인상은 그렇게 바쁘고 열정적인 모습에서 시작되었다. 창밖으로 따뜻한 초록의 생기를 뿜어내는 큰 나무 가지가 보여 사무실에 기분 좋은 봄기운이 퍼져 올랐다.

한국 조경계의 대모

정영선서안조경 소장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첫 졸업생이자 기술사 시험의 첫 여성 합격자라는 이력을 지닌 정영선 소장은 예술의 전당, 아시아공원, 선유도 공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등의 프로젝트를 주관하며 조경의 개념이 국내에서 자리 잡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현재까지 ,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조성에 일조해왔다. 어린 시절 보아왔던 고향의 헐벗은 산을 푸른 산으로 만들기 위한 소망에서 조경가의 길을 택한 그녀는 대지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조경의 의미를 설명해 나갔다.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단단한 기반으로 대지를 바라보는 분야가 건축이라면, 건축과 함께하는 조경은 자연과 더불어 생명력 있는 대지를 다루는 분야이며, 따라서 조경은 주위를 둘러싼 전체 환경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나무와 꽃을 심고 물길을 내며, 땅의 높이를 조절하는 조경의 지향점이 자연계를 아우르는 인간과 환경의 공생에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옛 것을 찾아

대지와 공간을 다루는 조경은 원래부터 있던 옛 것에 대한 이해가 필수였다. 조경 1세대 정영선 소장은 한국의 고유한 경관과 우리풍토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 가기 위해 옛날의 자연과 환경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조경에 대한 개념이 분명치 않던 시절이었던지라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인문학 적이고 통섭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옛 문헌에서 선비들의 자연관을 읽어내고, 문인들의 시구에서 선호식물을 찾았다. 고지도를 찾아 옛 지형을 읽어내고 진경산수화에서 과거의 경관을 상상했으며, 전국 방방곡곡의 지명을 찾아 지형의 유래를 찾았다. 이렇게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와 시적 이미지가 모여 전통조경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나갔다.

호암미술관  '희원'

호암미술관 '희원’ 서안조경 제공

우리 선조들은 뚜렷한 계절의 변화를 인정하고 계절성을 지닌 식물에 감흥을 받으며 자연스러운 시간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끼는 공간을 사랑했다. 그녀가 찾아낸 전통 조경의 개념은 한국전통 정원을 재현한 호암미술관의 ‘희원’조성에서 실현시켜 보았다.

전통과 현대의 만남

창경궁 ‘비원’ - 서안조경 제공

우리를 둘러싼 주위 환경을 조성하는 조경은 옛 것에 대한 이해 못지않게 새 것을 더하여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 중요한 작업이다. 이에 정영선 소장은 현재 우리의 삶과 일상,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일례로 전통 조경의 주요 개념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자연의 풍경을 경관 구성 재료의 일부로 이용하는 수법인 ‘차경(借景)’은 소유욕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정자문화와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피력했다. 또한 원래부터 있던 옛 것에 새 것을 더하는 과정은 현대인의 일상생활과 자연 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며, 나아가 조성된 환경을 해치지 않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보장할 수 있는 섬세한 안목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정영선의 문화재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현장을 바삐 돌며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정영선 소장. 마지막 질문으로 가장 좋아하는 문화재에 대해 묻자, 그녀다운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조경하는 사람인데, 무슨 이유가 더 있겠어요? 비원과 안압지지”. “소쇄원도 시적인 정원이에요. 고궁은 다 좋고, 민가에서도 옛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좋아요”. “화양정 같은 정자도…”.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올해 한번쯤은 선조들의 시간이 묻어나는 공간을 찾아 걸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감이 충만한 어느 좋은 날에...

글-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류홍보과 MUZINE 편집실 / 촬영-아메바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