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61호


전통과 현대의 만남

만남에 앞서
뮤진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숨쉬고 생활하는 일상에서 '온고지신'의 미를 찾습니다. 이를 위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을 만나 뵙고 그분들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국 문화의 역사와 전통이 여러분의 실제 격조있게 스며들 수 있도록 좋은 말씀 많이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한글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을까? 신조어, 외래어, 은어, 비속어가 남발되고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글씨가 소통도 단절시키는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세종대왕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 중 창제 철학과 원리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 중 하나이고 ‘자주, 애민, 실용’이라는 창제 정신과, 제자(制字) 원리의 독창성과 과학성이 뛰어나다는 점은 국제기구에서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한글의 무한 확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았는가? 여기, 한글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이 디자인의 대상이라는 생각조차 희미했던 시기 ‘한글 디자이너’라고 이야기 한 사람이 있다. 바로 1세대 한글 디자이너 한재준. 그의 한글 사랑을 들어본다

성찰로부터 시작되다 텍스트

미술학도를 꿈꾸던 그는 또래와 같이 구상을 열심히 했다. 아그립파(Agrippa)를 열심히 따라 그렸고, 외국인이 저술한 여러 서적을 끊임없이 봤다. 대학 진학 후 사진과 똑같은 사실주의적 구상 작품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고 심미주의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넘쳐나던 그 시절을 보내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민중미술이 한국 미술 흐름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답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한국적인 것에 매료되다 텍스트

구애 받지 않되, 한국적인 것, 그는 남관 화백, 고암 이응노 선생의 문자 추상을 보며 흥미를 느꼈고 이를 계기로 한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표현 요소로서의 한글 탐구를 시작으로 점차 소통의 도구로서 한글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훈민정음에 관련한 도서는 빠지지 않고 찾아 읽고 연구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자세로 한글을 탐구하고 또 연구하며 그렇게 한글 디자인에 한 걸음씩 다가갔다.

이기불이 2013 텍스트

  • 이기불이(2013)_1
  • 이기불이(2013)_2
  • 이기불이(2013)_3

철자, 이미지를 만나다 텍스트

한글에 흠뻑 빠져있을 그때 미국의 유명한 타이포그래퍼 허브 루발린(Herb Lubalin)의 <마더 앤 차일드(MOTHER & CHILD)>의 이미지를 만났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슬라이드를 통해 보여주신 작품이에요. 그것을 보고 놀랐답니다. 글씨가 단순히 문자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온전히 시각이미지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에 말이에요. 활자 이미지이죠!”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순간에도 당시 그가 느꼈을 희열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나’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글디자이너', 세종 이도의 철학을 말하다 텍스트

1980년대 ‘한글 디자이너’라는 명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글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고, 최근에 ‘한글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니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한글의 가치를 공유하고 한글의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해 책을 읽고 타이포를 그리고 만들었다. 그는 “세종 이도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어진 성품이 ‘한글’ 이라는 큰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원천이었습니다. 한글 정신은 세종의 디자인 철학이며 정체성과 주체성을 가진 그의 자세는 모든 디자이너가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라며 쉬운 글자를 만들기 위해 우주의 이치를 글자에 담아낸 세종 이도의 디자인 철학과 원리를 강조했다.

1.한글씨알(2010), 2.나는 한글이다(2013) 텍스트

  • 한글씨알(2010)
  • 나는 한글이다(2013)

 탈 네모틀의 한글꼴 일상화 시키다 텍스트

그는 전형적으로 네모 틀 안에 가두어진 글자를 탈 네모틀로 바꾸어 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데 길을 열었다. 한글 창제 당시부터 탈 네모꼴 글자는 기반을 마련했으나 그 동안 여러 이유로 홀대 받은 것이다.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타자기 글자가 기존 네모꼴 글자에서 벗어난 탈 네모꼴의 모습이다. 이것 역시 한글의 구성 원리에 따른 것으로 한글 기본 구조인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성되는 세벌식 구조이다. 공병우 박사와 한재준 교수가 함께 만든 ‘공한체’의 등장으로 탈 네모꼴 글자의 일반적인 사용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공한체’라는 이름은 공병우 박사와 한재준 교수의 성을 따 붙인 이름이다.)

1.전환무궁한글,3D VARIATION(2011) 2.고향의 봄(2015) 텍스트

  • 전환무궁한글,3D VARIATION(2011)
  • 고향의 봄(2015)

한글의 무한 확장성을 보여주다 텍스트

최소주의는 한글 창제 원리 중 하나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6개의 블록이야기는 흥미로웠다. `ㄱ', `ㄷ', `ㅇ', `ㅏ', ‘ㅡ’, `ㅣ'. 이 여섯 개의 자모음으로 현대의 모든 한글을 표기할 수 있는 단순한 조합의 체계는 놀라웠다. 이것만으로 다양하게 뜻과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모든 사물의 이치에는 근본이 있고, 한글은 소리, 글, 뜻이 하나의 이치인 ‘이기불이(理旣不二)’라는 세종 이도의 진리관을 그대로 적용 시킨 것이다.

1. 이치가 둘이 아니다. 2.한글씨알(2011) 텍스트

  • 이치가 둘이 아니다.
  • 한글씨알(2011)

박물관, 미술관에서 배우다 텍스트

그에게 있어 절대 빠트릴 수 없는 우리 우리 문화재는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자모가 생긴 이유, 디자인 배경, 사용방법까지 설명하고 여기에 철학과 원리, 활용법을 세세하게 밝히고 있으니 이는 곧 디자인 설명서이자 매뉴얼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이야기할 수 없다. 박물관에 마련된 ‘사랑방’의 탁자, 옷걸이 하나하나에도 소소한 아름다움이 묻어 있고 그것이 곧 하나의 이치로 연결되는 것이라며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한다. 그는 한글 디자이너로 또 교수로 바쁜 삶을 살고 있지만 “삶을 통해 우리의 가치를 빛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좋다”고 한다. 앞으로 한글을 주로 연구. 계승하는 조직과 기관이 생겨났으면 한다는 소망을 말했다. 덧붙여 세종 이도가 한글을 만든 경복궁의 영추문과 세종 이도가 태어난 당시 한성부 북부 12방 중 하나인 준수방(俊秀坊)인 현재 종로구 통인동 지역이 그의 뜻을 기리는 길로 조성되어 내 · 외국인 할 것 없이 누구나 찾아와 한글의 아름다움과 창의성을 느낄 수 있기를 꿈꿔본다.

글: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 뮤진 편집실 텍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