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지금 박물관에서는 II

인간은 누구나 머물고 싶은 곳, 실고 싶은 곳에 대한 꿈을 꾸었고, 이를 이상향이라 불렀다. 이상향은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환상의 공간으로, 때로는 대안적인 세계로 나타난다. ‘산수(山水)’는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높고 이상적인 정신세계를 상징하였으며, 인간의 덕을 기르고 평화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실경산수화를 그리면서도, ‘소상팔경(瀟湘八景)’, ‘무이구곡(武夷九曲)’, ‘도원(桃源)’과 같은 마음의 눈으로 그린 이상적인 산수화를 끊임없이 그렸다.
전시중인 산수화 속 이상향의 모습을 찾아보는 특별전,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에서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통해 현실세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이상향을 그린 산수화들을 다루고자 한다. 전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문(李寅文)[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를 비롯하여, 삼성미술관 리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국 상해박물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등 국내외 주요 박물관에서 소장한 명품 산수화 총 109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와 함께 총 5부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프롤로그 ‘청정한 세계, 산수(山水)’에서는 7세기 백제 산수문전을 통해 오래 전부터 청정한 공간이자 숭배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산수들을 살펴본다.

중국의 절경이 이상화되어 산수미의 대표적인 주제인 소상팔경을 다룬다. 소상팔경이란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동정호(洞庭湖)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여덟 장면을 말하며, 소상팔경도는 이상경(理想景)을 표현한 산수화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파생된 ‘팔경(八景)’은 이후 각각의 명승지들을 모아서 그리는 이른바 ‘팔경문화’를 양산하였다. 이처럼 소상팔경도는 동아시아 회화사에 있어 상호 연관성과 독자성을 고찰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하규(夏珪)의 [산시청람(山市晴嵐)](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은 가장 이른 시기의 소상팔경도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또한 중국 명대(明代)를 대표하는 화가인 문징명(文徵明)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동기창(董其昌)의 초기 작품인 [연오팔경도(燕吳八景圖)](중국 상해박물관 소장) 등 중국 남송~명대에 이르는 대표작들이 선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선 초·중기 소상팔경도와 우리의 팔경문화를 잘 보여주는 정선의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가 모처럼 전시되며, 일본 무로마치 시대 아미파(阿彌派)의 거장 소아미(相阿彌)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도 소개한다.

무이구곡은 존경하는 현인(賢人)이 머물던 곳을 이상화한 대표적인 예를 소개한다.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는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자(朱子)가 노닐던 중국 무이산(武夷山) 구곡계(九曲溪)의 자연경관을 그린 산수화이다. 이 주제는 특히 성리학이 정착한 조선에서 성행하였는데, 선비들은 무이구곡을 널리 애호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땅 곳곳에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특성을 보인다. 이 장에서는 조선시대 가장 오래된 무이구곡도인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圖)]과 이성길(李成吉)의 [무이구곡도]를 주목해 볼 만하다.

3부에서는 조선 문화예술의 부흥기인 18세기, 지식인들이 꿈꾼 사회상을 담은 산수화를 만나본다.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자연과 사회와 개인이 서로 평화롭게 어울려 생활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백성들은 각자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군주는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려 조화를 이룬 곳. 이는 유교(儒敎)에서 꿈꾸어 온 최고 이상 국가의 형상이며, [강산무진도]가 보여주는 이상향의 세계이다. 반면 필자미상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산수의 비중은 작은 대신, 화려한 건물을 배경으로 인물 군상들의 다양한 삶이 적극적으로 부각된 도시의 경치를 그리고 있다. 다양한 물품을 파는 상점과 인파로 가득한 거리의 모습은 풍요로운 도시의 이상적인 삶을 보여준다. 이처럼 도시 생활 중심의 [태평성시도]와 전원생활 위주의 [강산무진도]에서 그들이 꿈꾸었던 풍요롭고 부강한 사회에 대한 희망이 투영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4부에서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 귀의하고자 한 선비들의 ‘은거(隱居)’의 삶을 그린 다양한 작품들을 다룬다. 선비는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덕을 갖춘 후 벼슬길에 나아가 왕을 보좌하며 백성을 돌보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그러나 그 뜻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연에 귀의하여 수양에 몰두하였는데, 이러한 삶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도연명(陶淵明)과 왕유(王維)이다. 그들은 자연에서의 소박한 삶을 그린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은자(隱者)의 삶을 대신하였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주제로 한 [귀거래도(歸去來圖)](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는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작품이다. 김홍도(金弘道)는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에서 자연과 함께 한 삶을 정승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주제를 8폭 병풍에 장대하게 담아냈다. 한편 전기(田琦)의 [귀거래도]와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와 같이 조선 말기 신분의 한계에 부딪히며 그들만의 은거를 꿈꾼 중인(中人)들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5부에서는 도가(道家)에서 추구했던 이상향, 즉 낙원(樂園)을 주제로 하였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은 그들이 추구한 인간 본성에 따라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상향을 담고 있다. 이를 주제로 한 도원도(桃源圖)는 조선의 전 시기에 걸쳐 애호되었던 화제(畫題)였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도원(桃源)’이라는 낙원의 모습을 화려한 청록산수 기법을 사용하여 꿈에서라도 닿고자 했던 이상향의 모습을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화가 정운붕(丁雲鵬)의 [도원도](중국 상해박물관 소장)나 조선의 마지막 화원 안중식(安中植)의 [도원행주도(桃源行舟圖)], 일본의 근대화가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의 [무릉도원도](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와 같이 시대를 초월한 한중일 도원도에서 이러한 특징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또 다른 이상향’이라는 주제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혼란스러운 사회를 벗어나 일상의 안식을 누릴 소박한 이상향으로 산수를 택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본다. 여류화가 백남순(白南舜)의 유일한 작품인 [낙원(樂園)]은 서양식 유화로 동서양의 모습이 혼재된 낙원을 그려냈다. 그런가 하면 이상범(李象範)은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 속 일상에서 또 다른 이상향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1980년대 장욱진(張旭鎭)은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쉴 수 있는 편안한 풍경으로서의 산수를 해석하였다. 특히 [풍경(風景)]은 그의 미공개작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특별전은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 속에서 평안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멀리 7세기 백제(百濟)의 산수문전(山水文塼)에서부터 1980년대 장욱진의 작품을 아우르는 이번 특별전을 통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옛 사람들이 마음의 눈(心眼)을 통해 보고자 했던 다양한 이상향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