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지금 박물관에서는 I

공예와 회화가 결합된 왕실 미의식의 정수(精髓)로서 조선 청화백자를 살펴보는 이번 기획전은, 국내에서 열리는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청화백자 전시이다. 조선 최고(最古)의 청화백자에서부터 전통의 미감(美感)을 이은 현대 작품까지, 그 흐름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다.

조선왕조는 백자를 왕의 그릇으로 정했고, 왕실의 백자는 경기도 광주 관요(官窯) 곧 사옹원(司饔院 : 조선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의 분원(分院)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백자 위에 왕실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들이 코발트cobalt 안료로 그림을 그렸다. 코발트는 이슬람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매우 값비싼 안료였고, 굽는 과정에서 실패하는 경우까지 생각하면 청화백자는 귀하디귀한 고급품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의 오례(五禮)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왕실의 법식을 세우고 기물(器物)의 범례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궁중 잔치 때 꽃이나 술을 담았던 청화백자 용무늬항아리[용준(龍樽)]는 왕실의 예(禮)를 대표하는 기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실은 문인(文人) 취향의 선도자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청화백자에도 문인풍의 시(詩)·화(畫)가 장식되었는데, 가느다란 세필(細筆)로 한 줄 지평선 위 사군자를 그려 넣은 항아리와 난초와 칠보(七寶)무늬가 함께 어우러진 표주박모양 병,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한 장면을 몸체 가득 채워 넣은 산수무늬 항아리는 흡사 문인화를 백자 위에 옮겨놓은 모습이다. 물가 나무 아래 한가로이 앉은 노인의 모습과 정교히 묘사된 까치 호랑이 그림도 우윳빛 기면(器面) 위에 파란 빛깔로 나타나며 회화와는 또 다른 아취를 풍긴다. 또한 조선 후기 지식층은 꽃화분을 키우는 것이 취미였는데, 매화와 파초, 국화, 패랭이, 연꽃 등이 특히 사랑받았다. 이들 꽃들이 마치 도성(都城)을 가득 메웠던 꽃향기처럼 청화백자에도 풍성하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 왕실의 전유물이었던 청화백자의 향유층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폭 확대되었다. 한양(지금의 서울)의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시민 계층의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관요 생산품을 왕실과 사대부 외에도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체재가 변화하였다. 값싼 코발트 안료가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되기도 하여, 그릇의 종류와 형태가 매우 다양해지고 생산량도 대폭 늘어났다. 마치 꿈과 바램이 온 천하를 뒤덮듯 장수(長壽)과 복(福)을 희구하는 마음이 직접적으로 청화백자에 표현되었다. 십장생(十長生)과 물고기가 그려지고 ‘탕지반(湯之盤)’이라는 명문이 쓰인 커다란 반(盤)은 청화백자의 장식 소재와 쓰임새가 생활 속으로 한층 다가섰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조선 후기 왕실의 행사에서 사용되었던 청화백자들은 여전히 질적(質的)으로 일관된 품격과 수준을 이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조선청화靑畫, 그 푸른빛에 물들다”전을 통해, 공예이자 회화이고 그릇이자 미술품인 청화백자의 특성과 조선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왕실 청화백자의 미의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하얀 바탕에 파란 그림을 그려 넣는 한국적 감각과 방식, 그 안에 내재된 우아한 아름다움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계속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조선 청화백자의 푸르름 속으로 온통 빠져들 수 있는, 7주의 시간을 놓치지 말자.

글 : 임진아(전시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