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뮤진 칼럼

무더웠던 여름이 언제인가 싶게 이제 곧 가을의 정점이다. 지금이 바로 여기저기 명산(名山)에 가는 일정과 모임이 더욱 많이 만들어지고 주말에 시간을 내어서라도 유람을 다녀오는 시기이다. 유람은 날이 궂은 때, 너무 덥거나 추울 때 욕심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봄과 가을에 유난히 유람인파가 많고, 요즘은 개인이 카메라와 같은 기록매체를 가진 경우가 많아 경험을 공유하는 범위도 매우 넓다. 다른 사람의 기록을 통해 마치 내가 유람을 다녀온 듯 대리만족을 하거나 나를 위한 유람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비록 지금처럼 현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옛 사람들도 유람을 기록하고 그 경험을 나누었다. 누구나 유람을 하고 기록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선비나 그림그리기가 직업이었던 계층에 국한되었지만 가을에 자연을 즐겼던 여행의 기록들이 남아있다. 이번호 뮤진에서는 유람이 크게 유행했던 조선시대의 가을에 즐기는 유람의 기억들을 함께 더듬어본다.

멋진 산과 호수 등을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유람의 기록들이 명나라로부터 전해졌다. 높은 가을 하늘에 뜬 달이 중국의 동정호(洞庭湖)에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으로 마음을 달래보지만 자연을 향해 떠나고 싶은 마음은 깊어질 뿐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렇듯 명나라에서 전해오는 유기(遊記)들이 문인들의 문예취향과 만나 유람을 선망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북송(北宋)시대 미불(米芾, 1051년~1107년)이 그림에 썼다는 시에서 보이는 동정호(洞庭湖)에 대한 묘사까지 읽는다면 더더욱 유람을 향한 마음을 떨치기 힘들다.

아마도 몇 날 며칠을 움직여야 할 것이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눈과 마음에 담고 시(詩)•서(書)•화(畵)로 남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두고두고 바라보며 다시 유람하는 것처럼 마음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산을 오른다. 동자가 끄는 수레에서 내려 편히 앉아 가을 숲을 즐긴다. 정선(鄭敾, 1676~1759)은 가파르고 험한 곳까지 이르지 않고 몇몇 집도 내려다보이는 높이에서 단풍과 자연을 즐겼다. 산 전체보다는 가을 산의 기운을 즐겼을 것이다. 습기가 사라진 가을 산의 맑은 공기와 색색이 물들어가는 산의 정취는 현실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는 산 아래 집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자신이 자연의 곁에 사는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을지도 모른다.

깊지 않은 숲, 단풍든 풍경과 민가의 호젓함을 유람의 기록으로 남긴 사람에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도 있다. 산을 오르다 물가에 이르러 주변을 둘러보니 어부가 배를 띄워 고기잡이를 하고 그 뒤로 가을이 펼쳐져 있다. 그 모습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이 부채그림에 아름다운 가을풍경을 늘 즐기며 멀리 보이는 숲속의 집에 사는 어부에 대한 부러움을 시로 표현하였다.

사람은 계곡과 강이 있는 자연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람을 하지 않을 때는 나랏일과 선비의 삶 속에서 자연을 생각만하니, 그는 깊은 숨을 마시고 풍경을 감탄하며 잠시 자신의 현재를 한탄도 하였을 듯하다.

힘들게 산에 올라 한 평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맞은편에 금강산 봉우리들이 보이고 발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와 구름이 가득해 바다 위에 떠있는 듯도 하다. 세속의 일은 까마득히 느껴지고, 하염없이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곳이 “오르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했다”는 단발령(斷髮嶺)이라는 데 동감하게 된다. 정선뿐 아니라 조선후기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도 같은 장소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유람의 기록들이 전하면서 그 유명세를 높여주어 더욱 많은 이가 이곳을 유람하게 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명승 중에서도 조선시대 유람을 다녀와 그 기록이 가장 많이 전하는 산이 금강산이다. 사시사철 그 아름다움이 달라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한다. 9월 하순이면 단풍이 들기 시작해 유람의 최적기가 되는 금강산의 가을을 보고 싶은 마음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온다.

남녀가 바닥에 털썩 앉아 타작을 하고 있다. 건너편에서는 이를 지켜보는 이의 눈매가 매섭다. 그러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인 그들의 모습을 남긴다. 유명하다는 산천은 분명 아름답고 자신을 힘든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하는 경험을 주고 문학적인 감성도 자극한다. 그러나 때로 길가를 지나며 보는 풍경에서 유람의 기쁨을 느낀다. 나귀를 타고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며지났던 세상구경도 내가 사는 곳과는 어떻게 다른지 지금 현재 나그네인 내 눈에 보이는 일상은 이렇게나 새롭다는 것을 기록하고 병풍으로 남겨 곁에 두고 즐긴다. ‘가을의 사람들은 이런 일상을 보냈지‘ 하는 기억은 자연에도 계절을 따르는 민중의 삶의 현장에도 있지 않은 선비들이 하는 유람의 한 가지가 되기도 했다.

유람을 간다면 산 정상에서, 초입에서, 인파에 파묻혀서 가을의 한 자락을 보내게 될 것이다. 움직이고 산을 다니는 과정에서도 물론 기쁨을 느끼겠지만, 유람을 다녀온 기록이 그 즐거움의 정점이 될 수도 있다. 지금 그곳에 갈 수 없지만, 그 아름다움을 담은 가을의 유람을 조선시대 선비들의 눈으로 경험해 보는 것도 다른 의미에서 가을을 보내는 유람의 기억이 될 것이다.

글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 뮤진 MUZINE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