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유물박사 교실

뮤진 유물박사 교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곳은 뮤진 사이버 박물관에서 만나보았던 <E-특별전>과 <뮤진 확대경>을 또 다른 시각으로 만나보는 공간입니다. 우리 문화가 지닌 다채로운 매력 속으로 지금 들어가 볼까요?

이번호 뮤진확대경은 지난호에 이어 평양감사 향연도 중 <부벽루연회도>와 <연광정연회도>를 소개했습니다. 이 향연도에는 대동문, 부벽루, 연광정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각각 평양성 문, 평양성 내의 누각, 정자입니다. 또한 현대에 고증을 거쳐 무용으로 재연될 만큼 상세히 모사된 궁중무용이 부벽루연회도에서 보입니다. 따라서 이번 유물박사교실 중 뮤진 확대경과 관련한 내용은 작품에 등장한 건축물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의 국보 제1호이기도 한 평양성의 원래 이름은 장안성(長安城)이며 내성(內城), 외성(外城), 북성(北城), 중성(中城)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벽에는 작고 큰 15개의 문이 존재하는데 그 중 대동(大同門)은 내성의 동문에 해당합니다. 6세기 중엽 고구려 때 처음 지어진 후 수차례 복원하였고 그래서 고구려 건축양식을 계승·발전시켰으면서도 구조나 형태면에서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잘 드러냅니다. 또한 이 문은 대동강을 지나쳐 남으로 통하는 문으로 중요도가 높아 문밖의 나루터는 고구려때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고 합니다.
평양감사향연도에서도 대동문의 형태를 상세히 표현하고 있는데, 축대 위의 2층 문루는 정면, 측면이 각각 3칸인 팔작지붕입니다. 화면에서는 2층보다 1층의 지붕이 좀 더 휜 사실까지 표현하고 있어 놀랍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동강의 현판 중 무지개형 입구의 현판을 제외하면 양사언이 쓴 1층의 초서현판과 평안감사였던 박엽이 쓴 해서현판이 <월야선유도>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표현되었고,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린다는 뜻의 읍호루(揖灝樓)는 <연광정연회도>에서 분명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읍호루를 포함하면 이 하나의 성문건축물에 현판이 총 네 개 제작되어 걸렸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 성문으로 출입하는 사람이 많아중요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출입을 위한 문과 다른 용도의 정자는 주변의 풍광과 풍류를 함께 즐기고 감상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즉 대동문과 거의 맞붙어 있으면서도 연광정(練光亭)은 그 용도가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연광정은 빼어난 경치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처음 세웠을 당시의 이름은 산수정(山水亭)이었으며 온갖 풍광이 고루 비친다는 뜻의 만화정(萬和亭)으로도 불리웠답니다. 현재의 연광정은 대동강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리는 모습을 일컬은 것이며 그 누정에는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 ‘제일누대(第一樓臺)’, ‘만화루’라는 현판이 전합니다. 이 중 ‘천하제일강산’이라는 현판에는 독특한 내력이 있습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자세히 실려 있는 이 현판의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하제일강산의 독특한 매력

그리고 <월야선유도>에서 보이는 연광정에서는 작게 쓰인 ‘제일누대’라는 현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광정은 강기슭의 덕바위와 절벽이라는 지형에 맞추어 정한 구조로, 일반적인 정자의 구조인 ㄱ자형, 정(丁)자형, 육각형, 팔각형 등이 아닌, 두 건물을 개별로 지어 맞물린 것 같은 형태를 지녔습니다. 이렇듯 주어진 자연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고의 풍광을 볼 수 있었던 연광정은 평안남북도의 명승지인 관서8경에 포함될 정도로 관서지방 제일가는 풍경이었습니다.

원래는 392년 고구려시대에 세워진 영명사(永明寺)라는 절에 포함된 누각이었던 부벽루(浮碧樓)는 원래 이름이 영명루라고 합니다. 현재의 이름인 부벽루는 고려시대인 12세기초 예종이 이안(李顔)에게 이름을 짓도록 하였는데, 누각이 물에 떠있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과 6.25 전쟁 때 불탄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대동강가의 청벽루의 높은 벼랑 위에 세워졌기에 물에 떠 있는 듯 보였던 부벽루에서 바라본 경치는 옛 시인과 글씨를 쓰는 사람들에 의해 읊어졌습니다.
부벽루는 정면이 5칸, 측면이 3칸에 두 날개 공포를 얹은 날씬한 배흘림에 팔작지붕이 떠받들어져 있다. 정면이나 측면은 모두 기둥사이의 간격이 중앙은 넓고 양옆은 좁다랗다는 것을 <부벽루연회도>의 정면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내부의 중심에 비중을 주면서 힘의 분배까지 고려한 특징으로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부벽루와 문학작품

이번 에는 선조들의 피서법이 담긴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산수화나 고사인물도를 작은 부채의 화면에 그려 넣은 작품을 ‘선면화(扇面畵)’라고 하는데, 이번 유물박사교실에서는 이 멋을 담아내었던 조선시대 풍류의 아이콘인 선면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32 ‘잡지(雜志) 제1’에 담긴 내용이며, 고분벽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채는 황해도 안악군 유설리 안악 3호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 "고려의 태조가 즉위하자 후백제 왕인 견훤(甄萱)이 그 해 8월에 공작선(孔雀扇)17)을 축하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을 통해 이미 고려 초 10세기에 우선(羽扇)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채는 깃털로 만드는 우선(羽扇), 자루가 달린 둥근 부채인 단선(團扇), 접었다 펼 수 있는 접선(摺扇), 모양이나 용도가 다른 별선(別扇) 등 크게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접선에 관련해서는 고려기원설과 일본기원설의 다른 두 입장이 존재합니다. 그 사실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고려의 부채가 영향력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현재 전해지는 선면화는 조선시대 후기(18~19세기)의 것이 주를 이루는데, 이 시기는 명, 청대의 화보류와 진위작이 유통되면서 남종화풍이 크게 성행하고 풍속화와 진경산수화 같은 새로운 성격의 그림들이 다양하게 그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쉽게 들고 다닐 수 있고 선물로 주고받기도 용이해서 새로운 문화가 빠르게 형성되었습니다. 부채의 화면 즉, 선면에 시, 서, 화를 그려 마음을 담아 선물하거나 취향을 반영하고 이것이 차츰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러 서로 감상과 비평을 하며 풍류를 논하게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정자에 모여앉아 품평을 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라니 멋과 정취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특히 개인의 이동과 자연의 변화 시간과 공간의 배치 등에 있어서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회화의 형식이 문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선면화의 유행과 맞물려 그 가치를 점점 높여나갔을 것입니다.

이상으로 이번 유물박사교실에서는 평양감사 향연도에서 핵심적인 배경이 되었던 실제 건축물들과 기능뿐 아니라 의미에서도 특별함을 가진 선면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한여름 어느 계곡의 정자나 누각을 만나거나 지인들과 부채를 나누는 경험을 하게 될 때면 평양감사향연도나 소개된 선면화를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 뮤진 MUZINE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