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전통과 현대의 만남

만남에 앞서

첫만남

시원한 비가 아쉬울 만큼 뜨거운 기운이 강하던 오후, 한복디자이너 이영희 선생님을 뵈었다. 인터뷰가 줄을 잇는다는 말씀에 시큰둥한 인터뷰가 되면 어쩌나했던 것은 기우였다. 한여름 태양보다 뜨거운 마음을 품은 선생님의 우리나라와 한복에 대한 사랑은 인터뷰를 하는 장소의 공기를 울렸고, 마치 한 편의 영화를 통해 한복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공감하고 나온 기분이 되었다. 단순히 한복뿐 아니라 우리의 것, 전통의 요소들을 곁에 두는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하게 된 인터뷰는 깊은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보장받은 환경에서 적극적인 지지아래 의상디자인을 배우셨을 것만 같았던 선생님은, 주부로서의 삶을 살며 자녀를 위한 부업의 하나로 이불에 관련한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자투리 천으로 염색해 지어 입은 한복을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청이 늘면서 한복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소소하게 개인으로서 한복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바다를 건너 해외, 그것도 패션하면 떠오르는 도시 파리까지 가서 열과 성을 다하여 한복으로 도전에 도전을 거듭한 사연 앞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웃음을 거두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사랑이 넘쳐흐르면 그 방향이 새로운 길을 터주었고 그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으며 더 알리고, 입혀보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까지의 선생님을 이끈 것이다. 남들이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면서도 놓지 않은 애정이 있어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일컫는 선생님은 무려 28년 전 패션쇼의 영상을 꺼내셨다.

한불수교100주년 기념으로 1986년 파리에서의 첫 패션쇼를 열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3월 11일 디자이너 개인의 힘으로 프레타 포르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사이 선생님은 한국에서 소위 ‘한복쟁이’라 불리던 시기를 벗어나 디자이너로서 대중 앞에 서고 평가를 받을 준비를 했다. 프레타 포르테 참여를 위한 가능성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렸으며,

포트폴리오만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한국을 보여줄 기회를 만들고 한복과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세울 역량을 갖추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향하면서 한국사회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선생님의 이불과 한복을 찾는 사람은 늘어갔다.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음에도 선생님은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기보다 나아가려하셨다.
동양디자이너들이 파리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때, 한국에서는 한복쟁이라도 오히려 해외에서는 예술성이 충분하다면 모두 동일선상에서 디자이너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그 도시에 이영희 선생님이 가셨던 것은 운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선생님은 어째서 파리였느냐는 질문에 “나를 알아봐주고 아껴주는 첫사랑과도 같은 도시”라고 답하셨다. 그에 반응하는 선생님의 파리 활동은 뉴욕으로 영역을 확장한 이후로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파리에서 먼저 예술성을 인정받고 상업성을 확보해나가는 코스가 지금은 예전의 명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면도 있다지만 선생님을 디자이너로서 알아봐 준 파리는 앞으로도 변치 않을, 영감을 샘솟게 하는 도시일 것이다.

한복’ 을 그 이름 그대로 불리게 하고 가치를 매기는 과정에는 한국의 브랜드화가 절실했다. 더 정성을 다하고, 더 아름답게 만들어도 평가는 다른 나라의 전통의상에 빗대어 설명되는 등 절하되었다. 한복을 통해 첨단과 고급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 기업의 요청에 따라 50억원을 호가하는 백금으로 한복을 지을 기회가 왔다. 선생님은 이 한복을 루브루궁에서의 쇼에 선보였다. 그리고 한국을 더욱 잘 알 수 있도록 파리 뤽상부르그궁전 오랑제리 전시장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한복뿐 아니라 한국적인 다양한 요소들을 도입해서 선보였다.
이런 활동들을 사재를 써가며 지속해 온 선생님은 파리 패션계에서 한국과 한복으로 인식되는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고, 선생님의 성공은 미국에서도 이어질 것이라고 파리의 패션계 사람들이 이야기 해 주었다. 또한 그들은 패션산업의 중심이 된 뉴욕으로 진출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유했고, 미국 고객들을 통해 유명백화점에 입점하게 되었으며 결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쇼를 열게 되었다. 그 쇼에서의 홀대에 발동한 오기는 2004년 사단법인 미래문화를 설립하고 이영희 한국박물관이 개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하는 규모의 박물관을 운영하기에는 요구되는 바가 매우 많았다. 그래도 박물관과 쇼를 통해 지속적으로 한국과 한복을 알리기 위해 애 써온 선생님은 이번에 박물관의 모든 컨텐츠를 경주로 옮겨오기로 했다. 미국의 경제난으로 운영의 어려움이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어쩌면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는 진정 한국 내부에서 우리의 한복과 한국을 되새겨 볼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모아오신 우리 옛 옷과 해외에서 꾸준히 소개해 오신 한국의 여러 요소들이 전통을 유지하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 온 경주와 큰 어울림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쉬움이 깊이 남지만, 스미소니언박물관에 100년간 보관하고 전시할 선생님의 한복처럼 더욱 멀리 그리고 길게 본다면 다시 한복과 한국을 알리는 자리는 다시 마련될 것이다.

한복과 한국의 문화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하는 모든 시도가 선생님으로 하여금 더 큰 기회와 호의를 갖게 했다. 그것은 역시 어떠한 것이든 조화, 어울림이 중요하다는 선생님의 일관된 대원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복 그 한 가지로 한국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한국다운 것들과 함께 조화로운 모습의 한복을 보여줌으로써 그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2005 APEC 정상회담 때 21개국 정상이 두루마기를 입고 해운대 누리마루에서 입은 사진이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조화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된다. 등대와 언덕과 바다가 있는 환경을 직접 답사하고 정한 7개의 색을 각국 정상이 직접 선택하도록 하여 세심하게 제작된 두루마기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의 당당함을 한껏 살려주었다. 조화라는 것이 마치 하나인 듯 어울리면서도 낱낱의 것들이 그 가치를 충분히 드러낼 때 최상의 상태라면, 선생님의 쇼와 한복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한복의 소재나 형태가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과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지를 폄하하는데,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의 변용이 가능하다고 하시며 선생님의 한복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조화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사실 한복은 사계절과 간절기를 포함해 여덟 계절용이며 소재의 손질과 꾸밈에 따라 생각보다 넓은 범위의 계절을 커버할 수 있고, 소재와 꾸밈의 변화를 주기 어려운 서민들은 염색을 통한 색변화를 누렸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한복은 소재와 색의 변화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나갈 때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형적인 한복 외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 바 없는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 옛 벽화의 한복은 현대에 그대로 재현해도 모던하고, 특히나 신윤복의 여인그림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을 사랑한다고 하셨다. 그림 속의 옷감, 무늬, 입는 방법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가면서 그림을 탐구하셨는데 특히 미인도는 가장 좋아하시는 그림이다. 고운 얼굴표정과 전체 실루엣은 그림 주인공의 개인성향까지 드러내며 가녀린 몸매가 드러나는 굴곡에서 모던함과 섹시함을 발견하셨다며 연신 감탄하셨다. 미인도는 선생님의 한복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짧은 저고리 아래 드러나는 치마 맨 위에 둘러대어 허리에 닿는 부분인 말기에 자수를 놓아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자수만 따로 말기 부분에 부착 가능한 기능성을 첨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 한 가지 사례만 보아도 좋아하면 가만히 있지 않고 아이디어를 적용해 어떻게든 발전시켜나가는 선생님의 일관된 모습을 알 수 있다.
하지 않으면 모르되,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철저하게 해내고야 마는 선생님은 이 지면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던 어려움에 낙천적으로 대응해 온 선생님의 ‘마음의 힘’을 인터뷰를 통하여 보여주셨다. 글씨를 잘 쓰셨던 일제강점기의 억눌린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와 자녀와 남편을 위하여 최고의 염색과 바느질로 옷을 짓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국가에 대한 사랑과 색•디자인에 대한 감각은 언제나 가장 힘든 현재에서 무모할 정도의 도전을 멈추지 않게 했고 조각보로 만든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를 벗고 치마의 변화를 극대화 한 바람의 옷 등 처음이 되는 모든 것들을 이루어냈다. 전통을 기준으로는 파격적이면서도 현대의 기준에서는 전통적인, 이영희 선생님의 한복은 전통의 색채와 소재에 대한 깊은 공부에 기반을 두면서 변화와 조화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였기에 가능한 결과이다. 그래서 항상 중심은 전통에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일부러 전통을 찾아 가지 않아도 집 안에서 적어도 한가지만이라도 전통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고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께서 바라시는 것처럼, 국외에서의 한류만큼이나 우리 한복을 사랑하는 국내에서의 한류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