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MUZINE

50호


흔히 평양감사라고 부르는 직책의 제대로 된 이름은 평안관찰사(平安觀察使)입니다. 관찰사는 달리 감사(監司) 나 도백(道伯), 도신(道臣), 방백(方伯)이라고도 했기 때문에 평안감사라고도 씁니다. 평안감사와 평양감사를 혼용하게 된 것은 아마도 평안감사가 머무르는 감영(監營)이 평양에 있었으며, 평양이 가지는 입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양은 정치・경제에 있어 요충지였습니다. 과거 도읍이었기도 하고 도읍에 버금가는 정도로 국가에서 중시했던 지역이기도 했으며,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나 무역을 위한 물품들이 평양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상업적으로 발달하여 각종 유락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감사는 지방관리들을 평가하고 도내의 군사와 백성들을 지휘했던 직책으로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을 가진 종2품 벼슬이었습니다. 특정 지역을 통치하는 권력을 가진 인물인데다 여러 방면으로 번성한 지역에서 열리는 향연이니 이렇게 향연도를 세 폭이나 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월야선유도>는 평양성 건너편에서 대동강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으로, 을밀대(乙密臺), 능라도(綾羅島), 대동문(大同門), 연광정(練光亭), 부벽루(浮碧樓) 등의 지형지물이 성벽을 따라 지도형식으로 화면에 펼쳐져 있습니다. 2층 누각으로 세워진 대동문의 내부 계단과 각 층 현판에 서체가 다른 것까지 묘사되어 있을 정도이니 사실을 기록하는 데 얼마나 집중했는지 알만하지요. 이러한 사실성에 근거해서 이 도임축하 뱃놀이의 규모 역시 실제의 것과 동일했다고 보면 실로 큰 행사였음이 확인됩니다. 성벽을 따라 횃불을 들고 열 지은 인물만 250명에 가깝고, 맞은편 홰꾼과 구경꾼의 수도 200명이 넘습니다. 성벽측의 인물들은 비교적 무리들이 열 지어 질서 있게 모여 있는데, 관졸들이 열을 맞추어 횃불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소 엄격한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반대편의 인물들은 시선에서 가깝기 때문에 더 자세하게 묘사되었는데, 횃불을 든 사람들이 강변에 줄지어 있기는 하나 인물들의 복장이나 행동들이 더 자유롭고 활달한 구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복식에 대한 묘사도 세밀해서 도포를 입고 술띠를 맨 양반, 도포보다 아래 주름을 잡은 철릭을 입은 중인, 창옷을 걸친 형편이 나은 상민과 저고리에 벙거지를 쓰고 잠방이 바지를 입은 보통 상민의 구분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록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풍속화다운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행렬의 가장 앞은 취타(吹打)를 하고 있는 두 척의 배가 맡았습니다. 그 뒤를 대, 깃발, 등을 들거나 열을 지어선 관졸들이 탄 관청의 배가 다섯 척 따르고 있고 중심에 평안감사가 탄 평저선(平底船)이 있습니다. 배는 관선의 가운데 정자각을 세우고 지붕을 이은 모양으로, 배 앞쪽에서는 사공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양쪽에서 노를 젓고 후미에서는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조선식 큰 노를 젓습니다. 정자각의 앞 두 기둥에는 양쪽으로 나뉘어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으며 정자각 뒤편에 평양감사가 도장을 넣는 함을 옆에 두고 앉아있습니다. 관에 속한 기생들이 감사의 오른편에 있고 배의 뒤편에서는 음식을 준비해 따르는 배로부터 먹을 것을 건네받습니다.

감사가 탄 배의 옆에 등을 든 관졸들이 탄 배가 한 척 따르고 있으며, 사대부들이 탄 지붕이 있는 배가 바로 뒤를 따릅니다. 그리고 세 척의 가늘고 긴 배를 이어붙인 배에 나머지 관기(官妓)와 그 시동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타고 있고, 군졸이 탄 배가 호위하는 가마형식을 만든 배가 한 척 행렬의 말미에 있습니다. 아전과 구경꾼들의 배는 자유롭게 이 행렬과 속도를 맞추며 따르고 있는데 행렬 자체는 다소 건조하고 엄격해 보이지만 전반에 걸쳐 축하와 즐거운 행사를 보려는 사람들의 기대감이 느껴집니다.

화면 전체는 일관되게 화면을 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람이 불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행렬의 진행 방향도 그렇지만, 성벽너머 집집마다, 곳곳에 있는 깃발과 횃불의 방향이 모두 그렇습니다. 강 위 행렬의 말미에서 불을 피워 강에 띄우는데 강 표면이 이 가벼운 횃불을 배보다 빨리 흐르게 해 행렬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강 위로 움직이려 준비하는 배들과 강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배를 타고 선 인물들, 술 마실 준비를 해서 배에 탄 인물들까지 잘 묘사되어 형식에 맞추어 진행되는 감사의 행렬과 다소 구분되는 모습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6년 도과(道科) 합격자들에게 대동강변에서의 연회를 하사하고 이를 병풍으로 그리라는 명을 내린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듯 왕이 연회를 친히 명할 정도로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에게 대동강변에서 연회를 열었음을 기록한 그림은 의미가 컸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평양도>와 <도임행차도(到任行次圖)>가 유행하였습니다. 또한 평생 중 축하할 만한 일들을 모아 그린 <평생도(平生圖)>에 관직이 나아가는 경우를 포함시키는 것은 특히 평안감사로 부임한다면 더더욱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청구야담(靑丘野談)』에서는 이런 사실이 하나의 야담으로 실렸는데, 평안감사의 도임행차를 본 상민 부부의 아이가 본인은 평안감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몸져누웠다가 죽었고 그 아이가 내세에 평안감사가 되어 자신의 전생의 꿈을 꾸고 전생 부모를 대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책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대단했던 평안감사라는 관직을 받고 부임지에 도임한 감사는 이렇게 밤이 되기 전에는 이 <월야선유도>에 그려진 부벽루와 연광정에서 각각 연회를 열었습니다. 이 그림과 달리 평양성 쪽에서 바라본 시선으로 그린 두 연회에서는 또 어떤 내용들을 이야기하는지 다음호 <뮤진확대경>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