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뮤진확대경에서
소개한 금제 귀걸이를 떠올려 보세요. 금알갱이들이 귀걸이의 표면에 줄지어 이어지며 선을 만들고 문양을 만들어 냈습니다. 매끈한 금속 표면에 새로운 질감을 부여하며 산란하는 빛을 만들어내는 금알갱이 장식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이 기법은 신라에서만 사용된 기법이었을 까요? 유물 박사교실에서는 금제 장신구를 섬세하게 장식했던 기법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봅니다.
누금세공(鏤金細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금알갱이 장식은 3,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장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기법입니다. 4대 문명의 하나였던 메소포타미아문명의 기반이 된 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이 금속공예 기법은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 많은 사랑을 받으며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귀금속인 금을 재료로 한다는 태생적 조건과 엄청난 노동력을 전제로 하는 정교함을 기반으로 하는 이 기법은 사회 문화적으로 안정을 이룬 국가들에서 그 꽃을 피워냅니다. 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유행했던 그리스, 화려한 금속문화를 자랑했던 스키타이,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던 동서 문화의 요충지 사마르칸트 등에서 누금세공 장식 유물이 다수 발견되고 있으니까요. 정교하고 화려한 누금세공 기법은 통일 국가를 기반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던 중국 한나라(漢, 202 B.C. ~ A.D. 220)에도 전해졌습니다. 실크로드 등을 개척하며 서역과 활발히 교류했던 한나라는 다양한 금 공예품의 표면을 장식했던 이 기법을 동쪽으로 더 전파하는 역할을 합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만 리를 거쳐 한반도에 전해진 누금세공 기법은 황금 문화를 피워냈던 신라에서 또 한 번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지요.
찬찬히 귀걸이의 표면을 살펴보세요.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하고 작은 알갱이 하나를 표면에 부착해 내는 장인의 떨림이 느껴지시나요? 그 떨림은 어쩌면 현재를 사는 전 세계인의 DNA가 기억하고 있는 떨림일 지도 모릅니다.
나와 겸재는 시가 가면 그림이 오도록 왕복을 기약하여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 하였다. 시와 그림의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서 이루어지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더라. -이병연-.
<E-특별전>에서는 <신묘년풍악도첩>을 중심으로 정선과 이병연의 우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병연이 금화현(金化縣) 현감으로 있을 적에 36세의 정선이 금강산을 기행하고 남겼던 그림이었지요. 그림과 시에 재능이 있었던 두 선비가 평생지기로 마음을 나누었다는 사실은 약 30여년 후 그려진 <경교명승첩>(간송미술관 소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선은 65세가 되던 1740년, 양천현(陽川縣) 현감으로 부임합니다.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등촌동 일대를 아우르던 양천현은 한강 물줄기가 흘러가는 곳이었지요. 오랜만에 재회한 두 친구는 서로의 시와 그림을 바꿔보자는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마치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처럼 시상을 떠올리며 시를 짓고, 풍경을 화폭에 옮겨 담습니다. 글과 그림을 통해 아끼는 친구와 우정을 나눈 작품들은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지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이라는 제목의 화첩으로 만들어집니다. 좋은 풍광을 보며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고,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옮겨 적었던 것이지요. 상 · 하첩으로 구성된 <경교명승첩>에는 정선이 근무하던 양천일대의 경치 좋은 8곳을 그린 <양천팔경>을 비롯하여 총 33점의 작품이 전해집니다. 물론 그림에는 이병연의 시가 적혀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 화첩은 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첩은 상첩보다 10여년 뒤에 그려진 그림들이 묶여 있지요. 1751년 이병연이 먼저 세상을 뜨자, 평생의 벗을 먼저 보낸 친구는 그를 회상하며 양천에 있을 때 벗으로부터 받은 시찰
(詩札)을 그림으로 그려냅니다. 그가 남긴 시구를 곱씹으며 화폭에 붓을 대고 먹이 번질 때마다 친구가 떠올랐겠지요.
두 선비의 진심이 담긴 시와 그림은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도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친구에 대한 기억은 세상을 살아온 인류의 시간만큼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사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친구와의 우정이 손꼽히기도 하지요. 이번에는 남다른 우정으로 수많은 문학과 예술에 등장한 유명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소개시켜 드립니다. 후대의 귀감이 되어 옛 선인들의 글과 그림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이들을 만나보세요.
중국 춘추 시대 제(齊)나라에는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벼슬길에 올랐지만, 각자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되었고, 왕위를 둘러싼 대립에서 본의 아니게 적이 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제나라의 새 군주가 된 환공(桓公)이 상대의 측근이었던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가 나서서 "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몇 갑절 낫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라고 진언을 하였고, 그의 뜻을 받아들인 환공은 관중을 재상에 임명하였습니다. 제나라가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는데 큰 역할을 한 관중은 후에 포숙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내가 젊고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씩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래도 그는 나를 무능하다고 흉보지 않았다. 내게 아직 운이 안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온 적도 있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모셨던 공자 규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하여 동료 소홀(召忽)은 싸움에서 죽고 나는 묶이는 치욕을 당했지만 그는 나를 염치없다고 비웃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기보다 공명을 천하에 알리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형편이나 이해 관계에 상관없이 친구를 믿고 위해준 두 사람의 두터운 우정은 管中(관중)과 鮑叔牙(포숙아)와 같은 사귐이라는 의미의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표현을 만들어냈고, 벗을 대하는 마음의 본보기로 후대 사람들에게 회자
되었습니다.
먹을 갈아 붓으로 시 ⋅ 서 ⋅화를 즐기던 선비들에게 벼루는 친숙한 일상용품이었습니다. 선비들이 처음 붓글씨를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어릴 적에 물건을 인지하고 이름을 익힐 때부터 벼루는 당연한 듯 그 자리에 있어왔겠지요. 그래서였을까요. 문인들 중에는 당신의 곁을 지키던 벼루에 대한 심경을 글로 남긴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벼루에 대한 짧은 글 2편을 소개합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벼루에 대한 마음을 감상적으로 적어내고, 조선시대 문인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은 붓, 먹, 이불, 베개, 요, 자리와 함께 일상에서 사용하는 일곱 가지 물건의 첫 번째로 벼루를 들며 생활에 대한 다짐을 적어냅니다. 옛 문헌을 공부하고 현 정세를 논하던 문인들이 벼루에게 보인 관심은 일상과 삶에 대한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