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뮤진 칼럼

3월은 아직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딱히 어느 날 부터라고 정해주지 않아도 그 즈음 싹이 돋고 곧 꽃이 피리라 기대할 만한 변화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쨍한 볕 아래에 옷을 조금 가볍게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면 어느새 주변의 색들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봄비가 한 번 내리고 나면 급기야 생명의 기운을 분출하는 빛깔들이 눈에 든다. 가지각색의 꽃이 피고 푸른 녹색의 잎들이 사방에 가득해진다. 이러한 봄을 색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 옛 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전통색상인 오방색(五方色) 중에서 색이 만들어짐에 있어 시작이자 근본이 되는 청색(靑色)은 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 호 <뮤진칼럼>에서는 옛 사람들의 물건에서 색의 출발점인 청색의 흔적을 찾아본다.

적선 積善

전통색에서는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는 색을 청색(靑色)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오방색에서 정의된 내용이다. 오방색이란, 오방정색(五方正色)이라 불리는 황(黃), 백(白), 적(赤), 청(靑), 흑(黑)의 다섯 색을뜻하며 각각 중심, 서쪽, 남쪽, 동쪽, 북쪽의 방위를 의미한다. 청색은 오행 중 나무(木)를, 계절로는 봄을 뜻한다. 음양오행에서의 봄은 음력 3월까지를 의미하므로 지금 우리는 봄의 절정을 향해 가는 중이다. 청색은 딱 하나의 색만을 지칭한다고 하기 어렵다.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색채용어사전에서는 청색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물 속에 고인 맑은 물빛과 같은 색. 초록색기가 있어 풀잎의 색과 흡사하다. 정색(正色)으로 동방을 뜻하는데, 이는 어떤 특정한 색을 의미하기보다는 추상적인 색명이다. 색상환상으로는 초록색과 자색의 중간에 위치하며 흔히 청록색, 녹청색, 청색, 청자색으로 부르는 등 색의 분포가 넓다.

《한국 전통 표준색명 및 색상 2차 시안》의 90색은 적색계 21색, 황색계 16색, 자색계 11색, 무채색계 10색 그리고 청록색계가 32색으로 구성되어 있어 청록색계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이 청록색계에는 감색(紺色), 남색(藍色), 벽색(碧色), 비색(翡色), 녹색(綠色), 벽청색(碧靑色), 옥색(玉色) 등의 색이 모두 포함되어 청색과 녹색의 간색(間色), 청색과 백색의 간색도 있다.

예로부터
예로부터 이러한 색을 가장 다채롭게 표현해 온 것은 ‘천’이 아닐까 싶다. 석채를 빻아 입자 크기별로 나누어 불순물을 제거해서 안료를 얻기도 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쪽(藍)에서 얻은 색상을 기본으로 한 갖가지 천연안료들로 옷을 물들이거나 책의 표지를 만들기도 하며, 천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청색은 관복에 쓰여 품계(品階)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고, 특히 적색 위에 청색을 염색하는 검푸른 느낌의 감색은 황태자의 의복과 무관의 내갑의(갑옷을 착용하기 전에 속에 덧입는 옷)에 쓰였다. 천에 쓰인 농도 짙은 청색 혹은 감색은 의복이 아닌 곳에도 쓰였는데, 감지(紺紙)에 금니(金)나 은니(銀泥)로 글이나 그림을 그리는 경우이다. 감지란 쪽 염료를 사용하여 염색한 염색지로 주로 감람색(紺藍色)으로 물들인 색지 종이인데 이 위에 금이나 은가루를 사용하여 글이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특히나 장중함이나 엄숙함이 요구되는 경전의 필사에 쓰이곤 했다.

쪽을
사용한 안료는 회화에서도 빛을 발한다. 어좌 뒤나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 뒤에 설치되는<일월오봉도>는 왕권을 상징하는 회화로 엄격하게 도식화 된 화면을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배경이 되는 산, 하늘, 물의 색은 녹색과 청색으로 표현되었다. 해외에서의 관심도가 높은 <책가도>에서도 청색이 보이곤 하는데, 특히 책이나 기물이 쌓여있는 배경으로 푸른색이 쓰이곤 했다. 이 외에도 문자도(文字圖) 등에 쓰이는 새, 용, 물고기의 꾸밈에도 청색은 빠지지 않고 선명함을 드러내며 쓰였다. 관화 및 풍속화의 괴석(怪石)에도 푸른색이 사용되어 그 형태의 기이함이 더욱 선명히 부각되는데 푸른색은 이렇게 시선을 끄는 꾸밈에 적색과 함께 많이 쓰였다. 그렇다면 풍속화 역시 모두 민화에서처럼 아주 선명하고 같은 농도로만 청색이 쓰였던 것일까? 이즈음에서 아련하고 서정적으로 색을 사용했던 신윤복을 떠올릴 수 있다. <단오풍정>은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그네를 타려는 여인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작품이지만, 화면에 있는 네 여인이 농도가 다른 청색계통의 치마를 입고 있을 뿐 아니라 화면의 중앙에서 전면으로 흐르는 개울에 번지듯 청색이 아름답게 쓰였다.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은 쪽(藍)으로 농도를 조절하여 칠한 청색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산수화라고 하면 먼저 먹의 농담으로 그린 문인산수화를 떠올리게 되지만, 청색으로부터 녹색에 이르기까지 농담을 사용한 기암괴석과 산의 형태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 청록산수를 한국의 채색화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

이 밖에
출토 유물에서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청색계열의 유물을 만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 빛깔이 ‘비색’이라 칭해지는 청자(靑磁)라 할 수 있다. 청자가 모두 푸른빛을 띠는 것은 아니다. 청자 중에는 녹색을 더 짙게 띠거나 황색, 회색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것도 있지만 ‘비색’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청색계통을 말한다. 청자를 보면, 그것이 지니는 색을 딱히 지칭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비색이라는 단어는 청자의 색을 형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청록계열에서 유물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다른 두 색은 ‘벽청색(碧靑色)’과 ‘옥색’이라 할 수 있다. 벽청색은 밝고 푸른 청색으로 구리에 녹이 나서 생기는 푸른 빛깔을 말한다. 보통 구리가 가지는 붉은 색이나 아주 짙고 어두운 갈색 위에 녹이 나면 녹색의 기운이 느껴지지만,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 향로, 청동 등잔, 범종 등은 색이 바래 진 듯 완벽히 표면을 메우지 않고 푸른 느낌을 자아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녹청의 착색재료는 황동판에 식초를 칠하여 색을 얻는다니, 현대사회에서 색을 나타내는 수치는 사용의 편리를 위하여 정하는 것일 뿐, 본디 색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유연한 개념인지 생각하게 된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에는 고인이 사후에도 수호를 받고, 내세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재료와 용도 면에서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무덤 주인의 지위, 성별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옥(玉)’을 들 수 있다. 여러 색의 옥이 있고, 그 이름이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비취(翡翠)의 색을 옥색으로 여기고 있다. 옥은 특히 지니고 장식하면 약효가 나타나고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경주 천마총 출토 유물의 절반 이상이 옥 종류의 구슬 이라는 사실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금관이나 귀걸이의 굽은 옥 장식을 보아도 귀한 것을 상징하는 장식으로 옥이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봄을 나타내는 오방정색(五方正色)인 청색과 백색, 황색의 간색을 포함하는 봄의 색은 우리의 유물에서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파랗다’라고 하면 여름의 바다나 가을의 높은 하늘을 떠올리기 쉽지만 ‘푸르다’라고 표현한다면 오히려 봄에 가깝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이 봄, 물빛・풀빛・하늘빛을 모두 아우르는 푸른색을 박물관 유물을 보며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떠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