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50호


전통과 현대의 만남

만남에 앞서

첫만남

강추위가 꺾이고 겨울도 끝자락을 향해 가던 2월의 마지막 주. 섬유 예술가 장연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백련산 자락에 있는 선생님의 작업실은 자유롭게 정돈된 공간이었다. 찻물을 끓이시는 동안 작업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책상과 다양한 작업도구, 커다란 사진 몇 점이 눈에 띄었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벽과 천장에 매달린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은은한 쪽빛이 겹겹이 겹쳐진 작품들은 꽤 큰 부피를 가지고 있음에도 가볍게 고정되어 있었다. 짙은 푸른색인데도 어딘지 따뜻한 느낌을 지닌 작품들은 반복되는 질서 속에 자연스럽게 배열되어 있었다. 가까이서 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작품을 살펴보고 있을 때, 약간 상기된 목소리의 선생님께서 등장하셨다.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에 독특한 안경이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예술가. 선생님의 첫인상이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옥색 찻잔을 앞에 두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인류가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조건인 의식주 중 가장 앞에 위치한 ‘의(衣)’는 섬유의 영역이다.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편안하게 해 주면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목적을 지닌 섬유 예술 분야가 가지는 여러 가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작업의 재료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섬유 예술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기 전이었던 1970년대 초, 대학에서 파라핀 염료로 염색하는 납방염 수업을 듣고 염색의 매력에 빠진 선생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작업으로 표현해 오셨다고 하셨다. 나를 돌아보는 작업은 마음과 몸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또 그 위의 어머니가 대대로 옷을 짓기 위해 실을 만들고 천을 짜고, 이를 다시 물들이던 행위를 포괄하는 시간성이 작업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인류 태초의 예술로 섬유 예술이 지닌 오랜 시간에 대한 고민은 구조가 성글어 투명한 느낌을 주는 삼베나 모시와 같은 천의 선택으로 이어졌다. 한 장 한 장의 천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두 장 세 장을 겹쳐 놓았을 때, 서로 소통하며 마치 시간이 쌓이듯 중첩되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료를 선택한 다음에는 쪽물로 염색하는 과정이 뒤따랐다. 식물의 한 종류인 쪽잎을 끓인 물에 천을 넣어 염색하는 쪽염색은 연둣빛 녹색 물에 천을 담갔다 빼서 공기 중에 말릴 때 염료성분이 산화하면서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염색 방법이다.

쪽의 농도와 담금질의 횟수에 따라 푸른색의 농도가 달라지는데, ‘세모시 옥색치마~’로 시작하는 노랫말에 등장하는 옥색도, 빨려 들어갈 듯한 남색도 모두 쪽염색에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적게는 7~8번, 많게는 30번 이상 반복되는 염색과정으로 미묘한 색의 변화를 내는 쪽염색은 우리의 어머니들이 사용하던 전통의 염색법이면서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중첩된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이기도 했다.

쪽물을 들인 천들은 풀먹임 과정을 통해 일정한 형태를 갖출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빳빳한 힘을 얻은 재료를 원하는 형태로 조심스럽게 재단하면 조각난 천들을 이어붙이는 바느질을 한다. 선생님의 둥글거나 각진 작품들은 대부분 면과 면을 연결한 입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건축적인 구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이 작품들은 입체 바느질을 위해 직접 개량한 재봉틀 위에서 탄생한다. 이렇게 제작한 하나의 구조단위는 같은 과정을 반복한 다른 구조와 연결되는데, 중간 중간 다림질과 풀먹임, 바느질 과정을 반복하며 보통 15단계에서 20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고 한다. 재료의 선택에서 완성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과정은 결국 ‘시간성’을 모티브로 하는 작업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작업에 대한 설명에서 한국적인 것, 전통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가 이어졌다. 선생님께서는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의 DNA가 있다고 하시며 굳이 한국적인 것을 찾고 전통의 개념을 만들어 내지 않아도 작가가 스스로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정신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작업에서 한국적인 특징이 배어나올 것이라고 하셨다. 오히려 작업을 대하는 그런 자세야 말로 인류 보편의 예술작품을 만들고,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타고 났다고 노력하지 않는 무심함이 아니라, 본인의 것을 당당히 인정하고 본질적인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 나만의 언어로 인류공통의 정서를 담아내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오랜 시간을 축적한 전통과 오늘의 현대가 긍정적으로 마주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마지막 질문으로 선생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우리 문화재는 무엇인지 여쭤보았다. 장연순 선생님의 답은 반가사유상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두 점의 반가사유상. 국보 78호와 국보 83호로 각각 지정된 천오백여년 전의 조각상 두 점은 시간을 초월한 조형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몇 년 전, 어두운 조명 속에 단독으로 반가사유상을 전시하던 때, 매일같이 박물관으로 출근해서 그 아름다움을 보고 또 보았다는 선생님의 눈이 반짝였다. 하나의 상이 지닌 조형의 비례와 아름다움이 완벽에 가깝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말씀이 이어졌다. 처음 반가사유상이라고 대답하셨을 때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이내 곧 수긍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선생님께서 줄곧 말씀하셨던, 그리고 당신이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은 작업이 그렇게 시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인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초월적인 정신을 담은 작품. 선생님의 이상은 그렇게 실현되어 있었다.

글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 뮤진 MUZINE 편집실 / 촬영 - 아베바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