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49호


유물박사 교실

뮤진 유물박사 교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곳은 뮤진 사이버 박물관에서 만나보았던 <E-특별전>과 <뮤진 확대경>을 또 다른 시각으로 만나보는 공간입니다. 우리 문화가 지닌 다채로운 매력 속으로 지금 들어가 볼까요?

옛 사람들의 여행이야기 그리고<강산무진도>

세상의 빛을 본 두르마리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신라출신 승려 혜초가 천축국(天竺國)을 여행하고 남긴 여행기입니다. 중국에서 인도를 일컫는 명칭인 천축국은 캘커타 지방을 가리키는 동천축, 룸비니 일대를 지칭하는 중천축, 테카탄 고원일대를 가리키는 남천축, 봄베이 일대의 서천축, 차란타라의 북천축 등 총 다섯 지방으로 구성되어 오천축이라 불렀는데, 실제로 혜초는 인도의 다섯 지방을 다 돌아보지는 못하고 특히 남천국에는 전혀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완전한 문헌 형태로 남은 가장 오래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가 석굴로 유명한 중국 간쑤성(甘肅省) 돈황(敦煌) 막고굴 제17호굴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불리는 돈황 막고굴 제 17호굴은 1900년에 굴을 보수하기 위해 한쪽에 쌓여있던 모래를 쓸어내다가 벽에 금이 가면서 발견된 곳입니다. 기적처럼 발견된 또 한 칸의 석실에는 약 5만 여권의 경전과 유서들이 900여년의 시간동안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는데요, 이 때 함께 발견된 『왕오천축국전』은 사실 혜초가 여행했던 8세기에 직접 친필로 쓴 것이 아니라 9세기경 누군가에 의해 베껴진 사본이었습니다.
3권으로 존재했다는 기록을 남긴 원본과 달리 두루마리 하나에 첫머리와 끄트머리도 떨어져 나가고 없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8세기 전반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종교, 풍속, 지리, 역사 등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자료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여행자의 마음 문학을 만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 문학으로 손꼽히는 『왕오천축국전』에는 혜초가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시(詩)와 문(文)이 함께 엮여있는 글 중에는 지역의 언어·풍습·정치·산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구도(求道)의 길에서 느끼는 설레임과 향수 등을 담아낸 오언율시가 포함되어있는데요. 먼 거리를 오가는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 천축국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던 청년 혜초가 남긴 두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시를 각각 읽어보며 긴 여행을 떠난 여행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왕오천축국전>중(1) 정<왕오천축국전>중(2)

전국 방방곡곡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던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조선의 산하, 조선의 풍물을 직접 여행하면서 솔직한 감상을 남겼던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이른바 ‘진경시대’ 라고 부릅니다. 조선 18세기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을 들 수 있다면 시인으로는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을 들 수 있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라 80평생 우정을 나눈 두 선비는 함께 명승지를 다니며 감흥을 함께 나누었는데요, 이번에는 시인 이병연이 금강산을 기행하고 남긴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이병연의 <만폭동> 중 사천시초

사행의 소원을 이룬 강세황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평생 중국에 한번 가보는 것을 소원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국경을 넘어 타국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기, 다양한 볼거리를 통해 견문을 넓히고 싶었던 강세황은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66세가 되었던 1778년, 중국 사행(使行)을 떠나는 박제가(朴齊家, 1750~?)에게 전한 편지글에는 그가 느꼈던 답답함과 부러움이 엿보입니다.

"중국에 출생하지 못한 것이 한이며,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이기에
지식을 넓힐 도리가 없다. 중국학자들을 만나서 나의 막힌 가슴을 터놓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덧 백발이 되었는데 어떻게 날개가 돋힐 수가 있을까.”


그랬던 강세황에게 평생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중국 사행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강세황 나이 72세가 되던 1784년, 가을이었습니다. 청나라 건륭제가 50년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린 것을 축하하고 1785년 1월 6일에 열리게 되는 천수연(千叟宴)에 참석하기 위한 사신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던 것입니다. 강세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행 길에 본 신기한 경관과 중국학자들과 나눈 시문 등을 다양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사행 길에 본 세 가지 기이한 경관을 그린 『사로삼기첩』, 청 황실의 팔기군(八旗軍)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활을 쏘는 무예를 선보이는 ‘빙희연 氷戱宴’ 등을 그린 『영대기관첩』, 천수연에 참석하여 지은 시와 정황을 적은 『수역은파첩』등을 남긴 노년의 선비는 한껏 부푼 기대와 설렘을 현실에서 마주하는 순수한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강산무진도> 다시 읽기

<뮤진 확대경>에서 만난 ‘강산무진도’는 그림 부분만 세로 43.8cm, 가로 856.0cm에 달하는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어지간해서는 한 번에 펼쳐 전시하기도 힘든 크기지요. 제작도 쉽지 않아서 5개의 비단을 서로 잇대어 바탕을 만들고 먹의 농담을 위주로 한 담채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관람자의 눈이 읽어낼 수 있는 부분 부분은 독립된 화면으로 느껴질 만큼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화폭 전체는 대담하고 변화무쌍한 구성으로 연결되어 역동적인 기승전결의 짜임새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강과 산’이라는 의미인 제목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는 그림의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제목은 사실 이인문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붙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은 화폭을 꾸민 장황의 겉면에 쓰여 있어서 본래부터 있던 제목으로 보이기 쉽지만,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의미지요. 제목을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림을 감상한 사람이 느끼는 심정은 비슷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림 속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자연과 그 안에서 다양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모습이 함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소나무가 자라나고 기암괴석이 솟아난 화면 속 산천은 실제로 만날 수 있는 풍광은 아닙니다. 그런 자연 속에 삶의 터전을 잡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이지요. 이는 현실에 존재 하지 않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렸다는 의미입니다. 화가가 꿈꿨던 이상향이 화폭에 담긴 것이지요. 길고 긴 ‘강산무진도’ 두루마리를 천천히 되짚어보세요. 자연이 지닌 묵직한 힘과 이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글-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 MUZINE 편집실 / 사진제공 및 일러스트-아메바디자인, 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류홍보과 MUZINE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