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49호


전통과 현대의 만남

만남에 앞서

첫만남

뷰파인더를 통해 전통을 담다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실에 들어가면 커다란 항아리 사진이 하나 걸려있다. 부드러운 안개가 휘감은 듯 액자 속 공간에 백자 항아리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사진이다. 명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세부를 묘사한 모습이 아님에도 하얗고 넓은 사각 틀 속의 항아리는 실물과 유사한 느낌을 전달한다. 눈을 반쯤 감고 항아리를 본 모습이 이러할까, 많은 글에서 접했던 둥글고 풍만하고 넉넉하다는 조선백자 항아리에 대한 수식어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평면 이미지로 전해지는 풍만함. 한 장의 사진이 주는 매력에 빠져 한참을 서성이다 사진과 사진가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조선 백자의 미감을 사진에 담아내는 사진가 구본창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구본창의 사진

단풍이 절정으로 치달아 화려한 풍경에 눈이 시리던 어느 가을날. 구본창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시원하게 자리 잡은 창밖으로 노란 낙엽이 날리던 작업실에서 온화하고 단정한 인상을 지닌 선생님과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사진이란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는 기록성을 바탕으로 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현실을 떠난 사진은 없다는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진은 사진가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도구이므로 정보를 담는 것을 넘어 작가의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씀이 의미 깊게 다가왔다.

사진작가 구본창

한국에서 사진이 독립적인 예술로 인정받기 전이었던 1980년대, 대학에서 경영을 공부했던 선생님은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미술학교에서 사진 디자인을 전공하며 미술에 대한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6년간 이어진 독일 생활은 그에게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말이나 글로는 단번에 전달하기 힘든 한국의 전통적인 멋을 사진에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현재까지 지속된 사진 작업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탈, 조선 백자, 곱돌과 같은 사진 소재는 일상의 경험에서 마주친 대상이 오랜 고민과 만나 작품으로 발전된 예에 해당한다. 탈을 좋아하고 수집하는 소장가와의 만남, 우연히 들른 박물관의 백자 전시 등의 경험은 한국적인 멋에 대한 그만의 감수성이 담긴 사진 작업으로 재탄생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읽다

사진을 찍기 전에 피사체와의 충분한 교감을 원하는 사진가 구본창은 셔터를 처음 누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대상을 앞에 두고 오랫동안 바라보며 미세하게 변하는 빛에 따른 변화를 느끼고 본질에 가까운 느낌을 찾는 것이다. 오랜 사유 끝에 발견된 최적의 순간은 시간을 응축시키며 작품의 시각적 표피를 넘어 내면의 감성을 전달한다. 그의 사진이 지닌 초월적이고 명상적인 느낌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피사체와 사진가 사이에 이루어진 공감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조선 백자를 품은 사진

조선 백자를 품은 사진

조용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조선 백자가 들어왔다. 차가운 듯 따뜻하고 선명한 듯 은은한 백자를 박물관 전시실에서 마주친 다음부터 틈만 나면 백자를 관찰했다. 유물이 지닌 섬세한 세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을 넘어 조선 백자를 마주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풍만한 온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박물관 수장고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유물을 작업 소재로 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유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박물관 방침은 쉽사리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한국 도자를 사랑했던 재일교포의 사립박물관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일본 교토에 위치한 고려미술관으로부터 승낙이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구본창의 셔터에 담긴 백자 사진은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고 이후 국내외 박물관의 조선 백자가 그의 사진에 담겼다. 구본창이 교감하고 담아낸 조선 백자의 느낌은 그의 사진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과 공감해 나갔다.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직관적으로 전파되어 나간 것이다.

구본창의 문화재

사진을 위해 많은 대상을 관찰하고 또 많은 문화재를 직접 대면해본 사진가는 가장 좋아하는 문화재로 ‘가산오광대 작은 양반탈’을 들었다. 낯선 이름의 가산오광대 양반탈에 잠시 당황한 취재진을 위해 당신이 예전에 찍었던 사진 한 장을 찾아주셨다. 커다란 부채를 들고 갓을 쓴 인물 세 명이 나란히 서 있는 흑백사진 이었다. 사진 속인물들은 목을 전부 가리고 갓이 머리 위로 벗겨질 만큼 크고 긴 탈을 쓰고 있었다. 단순한 이목구비로 어딘가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는 그 탈들은 편하게 쓱쓱 만들어 오광대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탈이었다. 떠들썩한 실제 탈놀이와 상반되는 정적인 이미지의 사진은 낯설고 생경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움직임과 멈춤, 소리와 정적 사이의 간극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 내는 탈 사진을 보며 내년 대보름 즈음에는 가산오광대 탈놀이를 직접 구경하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탈에 대한 느낌이실제로 탈놀이를 구경할 때 어떻게 전달 되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글 -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팀 MUZINE 편집실 / 사진자료 제공 - 구본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