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48호


유물박사 교실

뮤진 유물박사 교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곳은 뮤진 사이버 박물관에서 만나보았던 <E-특별전>과 <뮤진 확대경>을 또 다른 시각으로 만나보는 공간입니다. 우리 문화가 지닌 다채로운 매력 속으로 지금 들어가 볼까요?

또 다른 달 이야기

이번 <E-특별전>의 주제는 달이었습니다. 소개된 유물 중 특히 고구려 시대 쌍영총 고분벽화 모사본에는 둥근 달 속에 두꺼비를 그려 넣은 예가 있었는데요, 이 때 달 속의 두꺼비는 설화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에 10개의 태양이 떠서 인간들이 고통 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 하늘에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던 예(羿)가 9개의 해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고 인간세상으로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예는 신선의 세계를 감독하고 불로장생, 불사를 주관하는 여신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두 개의 불사약을 얻게 되었는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욕심으로 두 개의 불사약을 모두 집어 먹은 아내 항아(姮娥)가 홀로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하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월궁(月宮, 달)에 머무르며 남편을 기다리던 항아는 시간이 흐르며 몸이 쪼그라들고 등이 울퉁불퉁해져서 마침내 두꺼비로 변했다고 전해집니다.

중국의 신화를 담은 『산해경』등의 기록에 남아있는 이 이야기가 고구려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넓게 퍼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달에 두꺼비가 산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술품에 달에 사는 두꺼비의 모습을 등장시키거나, 달의 여신 항아를 문학작품에 등장시킨 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달빛 문학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가득 차올랐다 기우는 달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떤 시대를 살았던 이 땅을 거쳐 간 모든 선조들은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달을 올려다보았겠지요. 선조들이 묘사한 달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기운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흐르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시간과 날씨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조형적 표현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달과 관련한 다채로운 문학작품을 살펴봅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백제시대 여인은 달을 바라보며 멀리 있는 임을 생각합니다. 유사한 정취는 천년의 시간을 넘어 조선시대 문인 정철(鄭澈, 1536~1593)에게 이어져 임금에 대한 충절로 승화됩니다. 비슷한 시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던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물[水], 돌[石], 소나무[松], 대나무[竹]와 함께 달[月]을 다섯 명의 벗이라 칭하며 오우가(五友歌)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대기 소설가 이태준(李泰俊, 1904~?)은 <달밤>을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가 이효석(李孝石, 1907~1942) 역시 달밤의 정취를 배경으로 장돌뱅이의 길을 그려냈습니다. 수많은 예인들의 감성을 자극했던 달. 그들이 남긴 달에 대한 기억을 만나 보실까요?

정읍사 보기 정철의 <송강가서> 중 일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 일부 보기

달 항아리를 유난히 사랑했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달 항아리는 실내에 놓인 정물로 표현되기도 하고, 실내의 도자와 창 밖에 보이는 달이 복합되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고국을 떠나 외국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도 고국을 생각하며 하늘같고 바다 같은 푸른 배경위에 두둥실 달과 항아리를 띄웠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에 대한 설명입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환기 화백은 많은 백자 항아리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가리켜 ‘항아리 귀신’이 될 것 같다고 했던 화가는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를 품에 안고 단순한 색조와 형체, 대범한 선의 변화에서 아름다움을 찾았습니다. ‘...나로선 미에 대한 개안(開眼)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글 한 구절은 여전히 너그러이 놓여있는 항아리를 다시 바라보게 만듭니다.

어지간한 건물 2~3층 높이에 해당하는 10m의 거대한 산수화 ‘강산무진도’를 그려낸 화가 이인문은 풍속화의 대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홍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뛰어난 도화서 화원이었습니다. 탁월한 기량을 지니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두 동갑내기 화가는 서로의 그림에 글을 써주기도 하며 인간적인 친분을 유지했는데, 실제로 김홍도가 그린 ‘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에는 이인문이 감상하였다는 글이 남겨져 있고, 이인문이 그린 ‘송하한담도 松下閑談圖’에는 김홍도가 적은 화제가 남아있습니다. 또한 ‘송하담소도 松下談笑圖’에는 을축년(1805년) 정월에 이인문과 김홍도가 함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함께 적혀 있어 두 사람의 교유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인문과 김홍도 두 사람의 작품 소재와 화풍은 매우 달랐다는데요, 김홍도가 대범한 필치로 풍속화나 진경산수화를 즐겨 그렸다면, 이인문은 치밀하고 정치한 정형산수를 주로 그리고 풍속화는 전혀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대에 산수로 이름을 날려 신필(神筆)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던 이인문과 풍속화의 대가로 조선후기 새로운 경지의 화풍을 개척한 김홍도. 서로 다른 작품세계를 지녔으나 그림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동료애를 나누었던 두 화원의 작품을 비교·감상해보며, 그림 속에 담긴 그들의 기량과 열정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글-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류홍보과 MUZINE 편집실 / 사진제공 및 일러스트-아메바디자인, 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류홍보과 MUZINE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