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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앞을 내다보기도 힘들만큼 짙은 운무입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안개가 걷히고 절벽을 이루는 바위산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냅니다. 바위 끝에는 강한 바람으로 가지가 이리저리 꺾인 나무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시선을 앞으로 당겼더니, 높게 솟아오른 소나무 몇 그루가 보입니다. 바위틈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소나무는 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월의 바람에 부대끼며 굵은 가지를 뒤틀고 서 있는 소나무는 고송임에도 불구하고 새파랗고 뾰족한 이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무의 배경을 이루는 운무의 바다 너머에는 사람들이 사는 고층 누각이 보입니다. 건강한 생명이 숨 쉬는 자연과 복잡한 인간의 세상은 짙은 안개를 사이에 두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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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좋아 보이는 노인 두 명이 나타났습니다. 마음이 꽤 잘 통하는 사이인 듯 한창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습니다. 광대한 자연 속으로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흥겨운 느낌이 듭니다.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가보니, 바위 절벽과 노송 사이에 화려한 건물이 자리 잡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단단한 바위 사이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들은 건물의 시야를 적절히 가려주며 공간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이들 뒤로는 기암괴석이 솟아 오른 산이 있고, 산 아래에는 마을이 있습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옆에 두고 집집마다 저마다의 일상이 펼쳐집니다. 준엄한 마을 뒷산을 올랐더니 드넓은 물길이 보입니다. 돛단배도, 조각배도 여유롭게 흔들거리며 흘러가는 물길입니다. 강 너머로 낮은 동산과 나무들이 일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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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 바뀌면서 뾰족뾰족한 선들이 나타납니다. 나무도 곧게 자라고 바위도 수직선으로 표현됩니다. 강 건너의 풍경도 수직의 느낌이 강해집니다. 돛대를 곧추 세운 배들이 열을 맞춰 정박해 있습니다. 강 위에는 큰 돛을 올린 배들이 떠다닙니다. 배 머리는 일제히 화면 왼쪽을 가리키며 그림의 진행방향을 암시합니다. 가까이 있는 배는 크게, 멀리 떨어진 배는 작게 묘사하여 원근감을 부여합니다. 짧게 반복되는 수직선은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에 활동적인 느낌을 더합니다. 강 아래 마을에는 나귀를 타고 갈 길을 재촉하는 사람과 짐을 지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이 그려집니다. 강가 너른 바위 위에는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편히 기대앉아 여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도 묘사됩니다. 이 시간을 오롯이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의 일상이 평화롭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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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자, 이번에는 잔잔하게 붓을 눕혀 찍은 점들로 표현된 부드러운 흙산이 나옵니다. 산과 바위에 둘러싸여 아늑한 마을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 마을에는 붉은 꽃이 가득 피어있는 것이 흡사 무릉도원을 연상시킵니다. 농담을 지닌 짤막한 점의 반복이 따뜻한 공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인기척 드문 길을 따라 좁은 물길을 찾아보니 뱃사공들이 힘주어 배를 달리고 있습니다. 길게 뻗은 장대를 크게 휘두르는 것으로 보아 배가 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뱃길 아래 정박해 있는 배의 돛대에 여러 장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습니다. 나뭇가지와 이파리들도 한 방향으로 일제히 움직이며, 바람소리가 “우웅...”하고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짐꾼들이 정박해 있는 배에서 짐을 내리고 있습니다. 어깨 가득 짐을 둘러매고 꽤 분주한 모습이네요. 짐꾼들 앞에는 흰색과 검은색 나귀를 탄 사람들이 발길을 재촉합니다. 먼 길을 떠나온 이들이 마중 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새로운 마을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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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대문과 같은 누각을 통과하자 물길은 계곡물이 되어 콸콸 흐르고, 화면에 험준한 산이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높고 험한 바위산은 높이를 짐작할 수 없이 솟아올라 정상부가 구름에 가려졌습니다. 나귀를 타고 산길을 걷는 행렬을 따라가자 밭을 일구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한 무리의 마을이 나타납니다. 강한 산의 기운을 받아 소나무도 힘 있게 뻗어있는 이곳은 한껏 소란한 모습입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 사이로 각자의 일에 열중한 사람들이 활기에 넘칩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심산유곡에 메아리칩니다. 깎아지른 듯 잘 생긴 바위산이 이들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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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바위산을 하나 넘자 산 중턱 마을이 나타납니다. 나귀를 잠시 세우고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높이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풍경입니다. 작은 마을 끝에는 굵고 튼튼한 나무로 단단하게 고정한 도르래가 보입니다. 길게 이어진 도르래 선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사람냄새 물씬 나는 산 아래 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귀를 매어 놓고 여기저기 짐을 풀어 놓은 사람들은 무리지어 바쁜 일상을 보내는 모습입니다. 윗마을로 올려 보내는 도르래에는 물건들이 담긴 큼지막한 소쿠리가 매달려 있습니다. 줄을 잡고 물건을 올려 보내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줄을 당기는 모습입니다. 덕분에 수직으로 빳빳하게 늘어진 도르래 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연결하며 화면에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마침 도르래에 매달린 소쿠리 뒤로는 먼 산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허공에 정지된 듯 선명하게 그려진 문명의 이기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잇고, 자연과 자연을 이으며 화면 속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이번 <뮤진 확대경>에서 관찰한 유물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 전반부입니다. ‘강산무진도’라는 명칭은 원작 위에 쓰여 진 것이 아니라 후에 덧붙여진 제목이지만, 강과 산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제목의 의미는 그림의 내용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가의 손을 따라 위대한 자연과 평화로운 인간의 삶을 만나보신 심정이 어떠신지요? 표구 크기가 44.4cm×915.6cm에 달하는 이 장대한 회화는 안개에서 시작해서 점점 선명해지는 구성을 취하며 그림 속 세상이 실재 존재하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제까지 본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시며, 다음 후반부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