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NE

48호


뮤진 칼럼

여민해락의 박물관

나들이하기 좋은 청량한 계절 가을에는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축제, 공연, 전시 등 각종 문화행사들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하게 열린다. 그래서였을까? 1909년 11월 1일. 지금으로 치면 늦가을에 우리나라 근대 박물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제실박물관이 국민에게 공개되었다. 본래 소수의 선택된 인원만이 관람할 수 있었던 진귀한 볼거리들은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순종황제의 여민해락 (與民偕樂) 정신에 따라 대중을 관람객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또 다시 찾아온 문화향유의 계절에 국민 모두가 소중한 문화유산을 관람할 수 있는 근대적 박물관의 시작에 대해 생각해본다.

진귀한 보배를  수장하는 보물창고

이왕가박물관 외관 (덕수궁 석조전)

박물관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뮤지엄(museum)은 고대 그리스의 교육·연구 기관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유래된 것 으로 이해되는데, 이 때 무세이온(MUSEION)은 그리스 신화에서 음악, 미술, 학문 등을 관장하는 뮤즈(muse)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안의 보물 창고였다고 전해진다. 인류의 역사를 따라 진기한 물건이나 볼거리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시설도 함께 발달해왔다. 우리나라 역시 나라의 보배로운 것들을 수장하는 보물창고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신라시대 세오녀의 비단을 보관했다는 ‘귀비고(貴妃庫)’나 보물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관했다는 ‘천존고(天尊庫)’등의 명칭이 등장하여 흥미롭다. 또한 고려시대 기록인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장화전(長和殿)’에 나라의 보물을 저장하고 경비를 엄하게 했으며, ‘보문각 (寶文閣)’과 ‘청연각(淸燕閣)’에서 조서(詔書)와 서화(書畫)를 보관했다는 내용이 남아있어 수장기능을 담당하는 시설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왕가박물관 외관 (덕수궁 석조전)

왕가의 문화유산을 대중과 공유

이왕가박물관 전시실 내부

이왕가박물관 전시실 내부

18세기 후반
이후 확산된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은 고고학적 자료, 미술품, 역사적 유물 등 의미 있는 사물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공개하여 지식과 문화를 대중적으로 공유하는데 주요한 가치를 둔다. 이전의 박물관이 수장기능을 중심으로 왕족이나 귀족 등 권력과 재력을 지닌 특정 계급에 종속된 시설이었다면, 국민국가 시대를 맞이하며 변화된 근대적 박물관은 전시 및 교육기능을 중심으로 대중에게 열린 공적 시설로 그 기능이 확대된 것이다. 영국에서는 1753년 설립된 대영박물관이 1759년부터 일반인 개방을 시작했으며, 프랑스에서는 혁명 과정에서 1793년부터 부르봉 왕가의 소장품을 바탕으로 루브르 궁전을 일반에 개방하였다. 동양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섰던 일본이 1872년 도쿄 국립박물관의 전신을 설치하였고, 중국은 1914년 자금성 전각 일부를 ‘고유물 전시관’으로 바꾸고 황실 소장 문물의 수장 및 전시를 시작했다.

이왕가박물관 전시실 내부

이왕가박물관 전시실 내부

한국 근대 박물관의 시작

창경궁 명정전 내부 전시모습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 1912년

창경궁 양화당

우리나라는
1876년 개항 이후 ‘신사유람단’, ‘보빙사’ 등으로 일본과 미국을 다녀온 사절단들의 보고서와 개화파 인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외국의 박람회와 박물관에 대한 제도 및 실태에 대한 정보를 접하였다. 근대적 박물관 설립과 관련한 논의가 구체화 된 것은 1907년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창덕궁 인접궁궐인 창경궁에 박물관을 비롯한 동물원, 식물원의 설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창경궁 명정전 내부 전시모습

대한제국은 1908년 1월 박물관 설비를 갖추고 소장품 수집을 시작하였으며, 8월에 박물관 · 동물원 · 식물원 업무를 전담할 ‘어원사무국(御苑事務局)’을 개설한 후, 9월에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설립하였다. 개관 당시 박물관은 별도의 건물을 짓지 않고 기존의 창경궁 안에 있는 환경전, 명정전과 양화당을 비롯한 부속 전각 7개 동을 일부 개조하여 전시실로 활용하였는데, 조선왕실에서부터 전해지는 서화류, 도자기, 금속공예, 가마와 깃발 등 약 6,800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다. 개관 당시 제실박물관 전각별로 나누어 진열된 전시품들은 순종황제를 비롯한 통감부 관리 및 소수의 일본인 관람객들만이 제한적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 1912년

창경궁 양화당

백성과 즐거움을 나누는 박물관

이왕가 일가사진

황실전용
유희공간의 성격을 지닌 제실박물관은 개관 14개월이 지난 1909년 11월 1일부터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자 하는 순종황제의 뜻에 따라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관람을 허용하면서 근대적 박물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박물관의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씩으로 어린이 관람객에 대해서는 할인을 적용하고 있었으며,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휴관하였다(목요일 휴관은 순종황제의 산책을 위한 것으로 1926년 순종의 서거 후 장례를 마치고 1927년 7월 1일부터 연중개관으로 운영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전각을 활용한 전시실이 전시와 관리가 불편하고 전시품의 도난 우려까지 있어 1910년 6월 새 제실박물관 건립을 추진하였지만 일제의 국권 강탈로 착공조차 하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 황실의 보호를 받는 왕실로 격하되면서 1910년 12월 30일에 공포된 ‘이왕직관제’ 에 따라 1911년 2월부터 박물관의 명칭을 ‘이왕직박물관’ 혹은 ‘이왕가박물관’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장소와 명칭을 바꾸어가며 국립박물관으로 최종 통합된 최초의 박물관은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대중에게 개방되었던 1909년의 뜻을 따라 꾸준히 박물관의 역할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왕가 일가사진

박물관은 오늘도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너른 품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넉넉함과 유익함이 있는 그 곳에서 시대를 초월한 여민해락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글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류홍보과 MUZINE 편집실